어쩌면 나 더 잘 해낼 수 있을지도?

새로운 세계로 나서기 위한 첫 발

by 김슬기






기대했던 것보다 난 더 잘 적응했다.

일은 늦은 시간이 돼서야 끝나고, 주말에도 나갔어야 했지만

재미있었고, 순조롭게 해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대견한 마음도 들었다.

친구들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놀러 오기도 하고 주말엔 여러 사람들과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내가 있던 장소와 생활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 아직도 낯설어서 여전히 이 모든 게 즐거웠다.


첫 월급을 받은 달,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렸다.

시합을 하면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쥐똥만 한 상금으로 뭐 잘했다고 그걸로 선물을 사드리기도 무안했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덜고, 최소한 남이 하는 만큼은 할 수 있는 그 순간이 행복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대학교 생활 또한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첫 학기엔 학교생활에 무지한 신입생들을 위해 엠티에서 조교가 짜준 스케줄(전공수업으로 꽉 채운)로 시작한다고 하는데, 나는 나이도 많으니 괜히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할까 봐 우려스러운 마음에 엠티에 가지 않았고, 때문에 사촌언니의 도움을 받아 첫 수강신청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막상 학기가 시작되고 나니 모든 건 나의 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기들 중 대부분은 나보다 어렸지만 우리 과 특성상 늦게 학교 들어오는 경우가 흔해서인지

무탈히 잘 지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CC도 하게 됐으니.


수강신청을 따로 했던 나는 동기들이 전공수업으로만 이루어진 시간표로 수업을 들을 때,

전공 중 하나를 빼고 교양 수업 중 심리학 강의를 들었다.

어떤 이유로 일찍이 전공수업을 가득 채워서 들어야 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필수전공 외엔 듣고 싶은 강의를 들어도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게 내겐 신의 한 수가 될 거라고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대학교 생활의 첫날.

첫 강의는 전공수업도 아닌 그 교양수업이었다.

인기강의였던 심리학 강의는 굉장히 많은 인원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그 넓은 강의실에서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학생은 나 외에 한 명뿐이었고 맨 앞줄은 비어있었다.

혹시 앞은 비워둬야 되는 자리인 건가? 싶었지만 뭐 뒤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가지 뭐라고 생각하고 그냥 앉았다.


교수님은 나이는 꽤 있으셨지만 다수임에도 일일이 출석을 부르시는 군인 출신의 호탕하고 유쾌하신 분이셨다. 첫날 내 전공과 이름을 부르시면서


"골프과야? 나 골프 되게 좋아하는데"라며 관심을 보내주셨는데,

그 덕에 다행히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앉아 바짝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월요일 9시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난 그 수업을 듣는 게 너무 즐거웠다.

다른 전공의 학생들과 함께 녹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고(누군가와 특별한 교감을 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골프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너무너무 즐거웠다.


그 강의를 듣고 있을 땐 내가 원래 뭘 하던 사람인지, 뭘 포기하고 이 자리에 오게 됐는지는 새까맣게 잊은 채 그저 시간에 푹 빠져있었다.


항상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앞자리에 앉았고, 질문도 대답도 열심히 했다.

매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께 가서 꼭 질문을 했다. 엄청 궁금한 게 있지 않아도 꼭 한 개씩 했다.

그래서였는지 시간이 갈수록 교수님은 질문을 하실 때 나를 자주 지명하셨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겐 모두 재미였다. 그 모든 것들이 새롭고 즐거웠다.


교수님은 말투는 꽤 강하셨지만 참 친절하셨다.

남들에게도 다 해주시는 정도였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게 너무 따뜻하고 감사한 분이셨다.

중, 고등학교 수업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내가 학교 강의를 들으면서 아예 따라가지도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교수님은 물어볼 때마다 어떤 것들을 공부하면 더 좋을지 어디서 찾아보면 되는지 사소한 것들까지 조금은 무뚝뚝한 말투로 누구보다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학기가 끝날 때쯤엔 교수님과 꽤 친해진 상태가 됐는데, 감사히도 10년이 지난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 교수님과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교수님께 물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 강의 들을 때 왜 잘해주셨어요? 맨 처음부터 잘해주셨잖아요."



"내가 뭘 잘 챙겨 다 똑같지 인마.

근데, 네가 뭘 알겠냐. 선수하던 애들 다 그렇지. 맨날 잔디밥만 먹다 온 게 뭘 알겠어.

안 그래? 내가 운동부 한 둘 봤겠어?

근데 그런 애들 중에 매주 맨 앞에 혼자 앉아서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 씩씩하게 손들고 대답하고 하는 게 기특해 보여서 그런 거지. 입원해서까지 전화로 그날 강의내용 물어보는 애들 별로 없어. 기특하잖아."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셨지만

난 그분이 아니었다면 내 대학교 생활 전체가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까지 달라졌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첫 발이었던 그날.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져주신 교수님 때문에 내 대학교 생활이 즐거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시간이 4년이나 남았다는 게 너무 행복했고, 그 시간들을 정말 잘 쓰고 싶었다.




그래야 정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하고 뒤돌아 볼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이전 26화호락호락하지 않아도, 누가 뭐래도 내가 선택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