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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Jan 16. 2024

'아이 돌봄 서비스'가 결제되었습니다.

    겨울방학이 2주가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또 기어이 삼키며 지내야 한다는 것인지.




    아이가 처음 맞는 겨울방학,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겨울방학을 코로나만큼 싫어하는 눈길을 보낼 때 입으로는 동조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그게 뭐 대수야'라는 생각을 살포시 갖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동네 산책 좀 다니고 도서관 한 번 갔다 와서 둘이 오붓하게 점심 먹고 늘어지게 책도 보고, 얘기도 나누지 뭐.'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뿔싸, 초보 학부모가 놓친 게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내 계획대로 차근히 이뤄줬을 때 평화가 깃든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우리 집은 빙판길에 널뛰기하는 중이다. 두 사람의 에너지 데시벨이 맞아떨어질 경우, 이렇게 순조로워도 되나 싶게 웃으며 문제집 몇 권을 휘리릭 풀어 갔다. 둘이 서점 데이트도 하고, 반찬가게에서 뭐가 맛있을까 머리를 맞대며 메뉴도 선정했다. 엄마 두 손이 무거울까 킥보드에 검정 봉지를 걸며 "엄마 무겁잖아, 내가 들게."라는 의젓한 말도 뽐내면 '어느새 내 아가가 이렇게 컸나, 곧 군대 가겠네' 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금 생각하니 칼바람에 눈이 시렸던 것 아닐까)



    그런데 이 늙은 XX와 어린 XY가 눈에서 불꽃이 튀면 걷잡을 수 없는 고성과 함께 신경질이 지붕 뚫고 뻗쳐 나갔다. 각자 널뛰는 기분의 최저 하향점이 만나 상대방 따위는 배려해 줄 수 없는 상태일 때, 우리의 다정했던 데이트는 온데간데없이 눈물 바람 시전하며 몇 시간을 대치하게 됐다.

"집중하면 금방 풀잖아. 이게 이럴 일이야?"

"똑바로 앉아, 지금 태도가 그게 뭐야?"

쌓인 문제집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의미의 한숨을 푹푹 쉬며 각자의 배터리가 소리 없이 방전됐다. 옆에서 엄마와 오빠 눈치를 보며 자기 할 일을 끝내고 있는 둘째를 봐도 레이저가 발사된다. 이런 내 모습을 남편은 예견했을까? 방학에 맞춰 열리는 수많은 특강을 무조건 해야 한다며 거듭 대리 신청을 하던 그였다.

'그래, 네 놈이 현명했다. 나는 이정도밖에 안 되는, 오늘도 널뛰다 미끄러지고 있는 애미다. 인정한다.'




    특강. 방학 때마다 온 동네 벽을 아름답게 휘날리고 있던 전단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들을 위해 준비된 특강이라는 이름을 한 '아이돌봄 서비스'였다. '어머니, 오늘도 집에서 지지고 볶으실 예정인가요? 아이는 잠시 맡겨 두세요. 두 시간의 평화를 약속합니다.' 전단이 속삭이는 속뜻을 내 이제야 알아채다니, 어디 마감 안 된 특강 없나 절실히 눈 돌려 보게 된다.

    대가족 시대에는 여러 사람이 품앗이 육아를 했다. 한 사람이 아이와 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아이와 인지 학습을 할 수 있었다.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 하듯이 원을 이루며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됐던 육아. 그 시절 아이들은 정말 '낳았더니 알아서 컸다'라는 명제가 성립했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 부모들이 동분서주하며 달달 볶고 있으면 유난이고, '괜히 하나 둘만 낳아 더 요란하게 키운다'라는 시선을 받게 됐다. 이 시대의 양육자에게 세상이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저출산이 문제라고 신문 1면에 앞다퉈 보도 되지만 현실판 육아 게임에 참여 하다보면 그 이유를 몹시도 체감하게 된다. '이번 레벨을 통과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레벨에 도전하세요. 하차는 없습니다.' 나 홀로 유유자적 키우고 싶은 마음도 크다만 한번 오른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을 경험하면 하차하기가 힘들다. 열차 뒤로 보이는 눈 덮인 하얀 세상은 낙오고, 지금 당장 우리가 갈 곳은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없어 보이므로. 이것이 가상 세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모두 참여하다 보면 가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 갇히게 된다.


© pixabay

    

    어떤 이는 그럴 수도 있겠다. 애한테 지나치게 관심 쏟을 시간에 부모 자신에게 투자하며 노년 준비를 현명하게 하라고. 하지만 이에 앞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어떤 부모라도 하기 싫어서 자기 앞가림을 안 하는 게 아니다. 잠시 나에게 투자한다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 헤매는 사이, 우리 아이는 부모의 시선을 피해 티비와 핸드폰, 패드에 접속한다. "엄마, 엄마 책 재밌어요? 글 잘 쓰세요, 방해 안 되게 티비보고 있을게요."라며 블루라이트와 깊은 우정을 쌓게 된다. 그러다 이내 곧, 아이가 부모 대신 가상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엄마의 레벨, 내가 대신 레벨업 해줄게요!"

     글 속에서 보이는 설정이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글'이라는 커튼을 거두고 나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끈적인다. 현실 속 부모가 자기 계발과 좋은 부모, 자녀 양육이라는 실타래에서 허우적거릴 때 매듭을 하나하나 풀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오늘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짧은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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