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 눈에 익은 이름이 울린다. 내 친구의 남편이자, 남편의 회사 동료인 k다.
"미다야, 어디야?"
"네? 집이죠"
"...별일 없지?"
"...ㅋㅋ 무슨 일이 있겠어요 오빠, 왜요?" 지난밤에 친구와 다툼이라도 했나, 무슨 일인데 이렇게 무게를 잡는 거야 생각했다. 곧이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귓가를 서성이다 튕겨졌다.
"...일단 옷을 입어. 일단 옷을 입고.. 나도 외근 중이라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형이.. 회사에서 쓰러졌대."
무슨 정신으로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담담했나. 비현실적인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되레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심지어 오늘 있을 첫째의 방과후 참관 수업이 걱정되어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아빠 시간 되면 바다 학교 참관 수업 좀 가 달라고. 엄마, 있잖아. 김 서방이 ... 쓰러졌대."
엄마 목소리가 들리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내 입으로 남편이 쓰러졌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생각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다. 왜 쓰러졌는지, 쓰러졌지만 의식은 있는지, 119에 연락은 했는지, 그 사람이...살아는 있는지.
몇 시간 같은 몇분이 흐르고 다행히 남편과 통화가 되었다. 핸드폰 너머 어눌한 그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 구급차에 타서 K대학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과 지갑, 키친타월을 몇 장 뜯어 택시를 불렀다. (눈에 띄는 휴지가 이것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3만 원이 넘는 택시비가 눈에 밟혔지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해 병원까지 갈 머리와 힘이 없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행스럽게 챙겨나온 키친타월을 눈에 대고 숨죽여 울었다. 백 미러로 힐끔거리는 기사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꽉 막힌 서울의 교통체증을 보고 있자니 이해하기 힘든 초현실주의 그림이 생각났다. 주변 사람들과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 섞이지 못하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동안 누군가는 찬란한 서울의 파란 하늘을 보며 처량하고 서글프게 울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여의도 빌딩 숲과 반짝이는 윤슬 사이로 거칠고 신경질적인 크렉션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택시 기사님은 분주히 발을 바꿔가며 거친 운전을 선보였다. 아마 도착지에서 느껴지는 다급함과 뒷자리에서 흐느끼는 여자의 처연함 때문에 난폭운전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응급실에서 회사 상사와 동료를 마주했다. 스치듯 인사한 뒤 보호자 목걸이를 전달받고 황급히 들어가 1-4 베드를 찾았다.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듯이 어색하게 누워 있는 그를 보자 눈물이 신경질적으로 쏟아졌다.
"나, 과부 만들 샘이야?"
몇 장 안 남은 키친타월을 얼굴에 대고 서글프게 울었다. 커튼도 칠 수 없는 응급실의 베드들 속에서 혼자 멜로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드라마는 현실성이 없다 말했는데 아니었다. 남편을 보자마자 왜 이 자리에 있냐며 화가 났다. 그리고 다신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반지 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하고 의례적인 검사를 하는 동안, 오늘 아침 출근길이 떠올랐다. 아직 자는 와이프를 깨우며 9년째 하는 출근 입맞춤,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한 아이들에게 다정히 건네는 손 인사, 새벽에 도착한 신문과 요구르트, 택배를 들여놓고 조심히 닫는 현관문. 노래의 전주처럼 잔잔하게 지나갔던 시간이 마지막 인사일 수도 있었다니, 손끝이 차갑다 못해 콕콕 찔렸다.
아이들에게 아빠라는 존재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과 함께 나 역시 이 사람을 생각보다 더 의지하고 있구나 깨달았다. 매일 퉁명스럽게 답하며 세상 제일 힘들다 툴툴거렸던 와이프였는데 남편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 지나간 시간을 주워 담고 싶었다. 마지막 모습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진 기분이었다.
친정 부모님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남편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옆에 있을 때 잘해. 그래도 옆에 계시는 게 어디야. 나중에 후회하지말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야." 남편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시부모님이 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일찍이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차렸다. 매번 '현자'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맞지....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예민하고 짜증이 솟구치는 날엔 나는 배배 꼬여 그렇게 하기 힘들다며 오히려 큰소리치기도 했다.
그런데 남편이 보여준 사랑이 다 맞았다. 정말 단순한 그 말이 진리인 것을, 꼭 이렇게 큰일을 당해봐야만 인정한다. 남편이 쓰러진 오늘은 바짝 꼬리 내리고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묻고 또 묻는다. 대화하다가 조금이라도 공백이 생기면 "오빠?"하고 물어본다. 몇 초의 정적도 참기 힘들다.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지 지나치게 확인하게 된다.
잠든 그의 코와 입에 가만히 손을 대본다.
규칙적인 들숨과 날숨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호탕한 코골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렇게 우리는 자면서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