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아파트 지하 분리수거장에서 누군가가 버린 CD를 발견하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동차 오디오 세트에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기대 이상의 감미로운 선율이 나를 미소 짓게 하였다. 음악을 들으면서 복권에 당첨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네 번째의 노래가 내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말았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 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다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라는 마지막 구절만 머릿속을 맴돌고 맴돌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서 그 노래를 다시 듣고 또 들었다. 그림이 그려지면서 눈물이 눈자위를 적셨고 내게 아직 감성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말 한 번 건네 보지 못한,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이름도 모르는, 딱 한 번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을 뿐인 소녀, 그 소녀를 위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도하겠노라는 아름다운 마음. 그 아름답디 아름다운 마음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왜 젊은 날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나는 왜 그런 순수함을 잃어버려야 했는지 안타까워하면서 눈부시도록 하얀 사랑 앞에 감사하고 미안해했다. 그리고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보고 싶은, 그리워하는, 무조건 주고 싶은, 존경하는, 무조건 믿어주는, 용서하는,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그 사람의 행복을 기도하는… 사랑이,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그 사람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이라면 ‘긴 머리 소녀’를 위해 눈 감고 기도해 주겠노라는 이 남자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조건도 이유도 목적도 없이 순수함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은 별로 없다. 긴 머리 소녀처럼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고맙게도 몇 년 전부터 길에서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예쁘게만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꼬마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누군가를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어졌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