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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Mar 12. 2024

엄마에게 물어보고요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지시만 기다립니다. 로봇이 되어 버린 아이들. 지시에 따

른 복종, 강요에 의한 움직임만 있을 뿐입니다. 우유 급식 신청을 하라 해도, 어떤 과목을 선택할 것인지 물어도, 야간 자율학습을 할 것인지, 병원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라 해도 부모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며 시간을 달라 합니다. 고등학생임에도 ‘엄마에게 물어보고요’가 기본입니다. 청소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지켜보고 있어야 겨우 쓸고 닦는 시늉을 합니다. 그것도 그날로 끝입니다. 청소한 흔적은 있지만 청소를 마쳤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부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거의 없습니다. 집중력이나 탐구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답도 서툴고 발표도 엉성하며 질문도 못하고 받아쓰기만 합니다. 아니, 해보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함께 슬퍼할 줄도 함께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부모들의 지나친 간섭과 도움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가장 노릇을 할 청년들을 어린아이 취급합니다. 믿고 맡기면 잘해 나갈 수 있을 텐데, 기

회도 주지 않고 할 수 없노라 무시하면서 대신 해 주고 도와주고 구경만 하도록 한 데에서 잘못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만한 어리석음, 이만 한 잘못이 또 있을까요?

 아이들이 판단하지도 결정하지도 못하는 수동적인 ‘마마보이’가 된 원인은 아이들에게서가 아니라 부모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부모의 욕심과 무지와 자기 위안 그리고 잘못된 사랑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 어른들은 이제라도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 

의심하며 맡기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스로 하도록 맡기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관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지각하여 야단을 맞는 것도 네 일이니 늦잠을 자든 여유를 부리든 알아서 하라’ 했어야 했고, 방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스스로 치울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여 대신 해 주고 야

단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7+4)×8÷2의 답을 구하려고 고민하는 아이에게 왜 빨리 문제를 풀지 못하느냐고 다그치지 말고 5분, 10분, 아니 1주일이라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아이 숙제를 대신 해주면서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윽박지르지 말고,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격려한 

뒤에 한 발 물러나 지켜보아야 합니다. 과잉보호 때문에 멀쩡한 아이를 약한 아이로, 무능력한 아이로, 창의성 없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음을 이제라도 반성해야 합니다.

 의견을 물으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답해 주겠다는 아이들, 시키는 것만 겨우 할 뿐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아이들, 스스로 해 보지 않아서인지 자신감 없는 아이들,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 창의력이 부족한 아이들,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어 책임감 없는 아이들…. 모두 기회를 빼앗아 버린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아이들은 절제력이 없으니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들 합니다. 청소년들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고 판단력과 자제력이 부족하니 가르치고 도와주고 간섭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과 학교에서는 ‘지나치게’ 도와주고 간섭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잘 기르려는 부모님의 마음에 돌을 던질 수는 없지만, 조금 빨리 성장시키겠노라 욕심 부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성장은 누가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

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자녀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모든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는 것은 오히려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에 등이 낙타처럼 굽었으면서도 나무를 잘 기르는 곽타타郭駝駝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곽타타에게 나무 잘 기르는 비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감히 제가 나무를 잘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만들 수는 없지요. 나무를 못살게 굴지 않고 자라는 걸 방해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나 약효가 좋은 약도 지나치게 먹으면 탈이 나듯, 칭찬과 나무람도 지나치면 안 하는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얽어매고 간섭하고 가르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직접 해 보아야만 자신감을 갖고 성취를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나 힘으로 하지 않은 일에서 어떻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고 행복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지요. 

 사랑도 주어 본 사람이 잘 주고, 용서도 해 본 사람이 잘할 수 있으며, 일도 해 본 사람이 잘합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아이에게 주어진 기회와 능력, 행복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마냥 놀았습니다. 공부는커녕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바람 빠진 공도 없어 나뭇가지, 돌멩이, 모래, 흙, 병뚜껑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땅바닥에 금을 그으며 놀고 숨바꼭질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청소와 심부름은 기본이고 논밭에 나가 어른들 일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몸과 마음은 무럭무럭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제각각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가 나서서 대신 해 주고, 선택해 주고 결정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바보 만들기일 뿐입니다. “네 마음대로, 네가 판단해서, 네 생각대로”를 외쳐야 합니다. 아이에게 무관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고 맡기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성취감과 좌절감을 느껴 보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로봇이 되어 버린 아이들을 보면 슬픔이 밀려옵니다. 바로 공부라는 괴물 때문입니다. 공부의 노예가 된 아이들이 지적 수준이 높아졌고 인성이라도 훌륭해졌다면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안타깝고 슬픈 현실입니다. 

‘오직 공부’를 외쳤기 때문이고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점수 얻는 방법만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강조하면서도 공부의 흥미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고 기다려 준다면 아이들은 올바르게 성장하면서 행복할 것이고 부모님들은 여유 속에서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권리 아닌 권리, 사랑 아닌 사랑으로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리조리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시간을 빼앗고,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빼앗아 사교육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놓고 몸도 마음도 약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의도와 다르게 나쁜 부모가 되어 버렸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의 마음’이라 이름 붙이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큰소리치고 있지만, 사실은 미움과 고통을 주고 아이들의 성장을 멈추게 하면서 미래를 슬픔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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