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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Mar 16. 2024

영수에 올인하는 안타까움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삶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학창 시절에 공부하지 않고 헛되이 흘려 버린 시간이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 후회는 영어·수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열심히 독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젊은날에 책을 좀 더 많이 읽었더라면, 인문학 도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시·수필·역사서 등을 좀 더 많이 읽었다면 좀 더 현명하게 살지 않았을까…. 옹졸하거나 비겁하게 살지 않고 좀 더 나은 선생이 되고 좀 더 괜찮은 아버지가 되었을 텐

데…. 지금 읽고 있는 책을 그때 읽었더라면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을 그때 깨달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삶을 더 풍요롭게, 조금 덜 부끄럽고 행복하게 영위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안타까움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 짧은 시간조차 왜 영어, 수학에만 매달렸을까? 대학 시절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영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했을까? 그 소중한 시절에 그 많은 시간에 좀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영어·수학 문제 풀이에만 젊음을 바쳤을까? 그 영어·수학 공부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인생의 가장 큰 후회는 독서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 교단에 설 수 있고 제자들을 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바탕에 영어·수학 공부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학에 들어갔을 것이며,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교사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입시가 영어·수학 중심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왜 모든 학생이 영어·수학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 이제야 의문을 품어 봅니다. 영어·수학이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사회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뼈저린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영어·수학 실력이 필요한 사람은 대학에서 열심히 하도록 하고 초·중·고 시절에는 시민으로서 필요한 교양과 상식 공부에 힘을 쏟으며 독서를 많이 하도록 교육한다면, 많은 아이들이 대학 입시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고 우리 삶 전체의 행복 덩어리가 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영어와 수학, 그중에서도 수학입니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수학 공부에 공부 시간의 70퍼센트 이상을 투자하고 문과생 대부분도 60퍼센트 이상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90퍼센트 이상을 투자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양 자체가 많고 어려우며 수학이 대학 입시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수학은 블랙홀입니다. 엄청난 ‘수포자’(수학 포기자)들도 문제이지만, 수포자가 아닌 고등학생 대부분이 공부 시간의 70퍼센트 정도를 수학 공부에 바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 수포자는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 비율은 증가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2학년 때까지 수학에 매달리다가 마지막에 결국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 후에 포기해 버립니다. 이 슬픔과 좌절을 아이들에게 꼭 주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고력 신장을 위해 수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수학의 중요성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수학은 어떤 현상 속에 존재하는 체계와 규칙성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학문이고 사고력·논리력·추리상상력을 길러 주며 원천기술을 개발하거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고 중요하고 필요한 공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처럼 ‘대다수’ 학생들이 ‘수학만’을 공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잘못된 일 아닐까요? 오직 수학만이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키는 데 필요한 학문일까요? 독서를 비롯한 다른 과목의 공부로는 사고력 신장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라 수학을 공부하느라 다른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이 문

제 아닌가요?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대다수 중·고등학생들은 독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시 위주 교육, 특히 수학 공부 때문입니다. 수학 공부에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독서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국어·사회·과학 등 다른 과목을 공부할 시간이 없고 음악·미술·체육도 즐기지 못합니다. 신체적·정신적 성숙이 빠른 시기, 배우고 익히고 키워야 할 것이 많은 시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에 아이들은 영어·수학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수학 중심의 교육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수학 시험 시간에 절반 이상의 학생이 시험을 포기하고 엎드려 자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수학 학습 범위를 줄이고 수준도 낮추어 아이들을 수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수포자를 만들지 않는 것만큼이나 수포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수학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아이는 수학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입니다. 수학에 쏟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아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을 포기해도 대학에 갈 수 있고, 수학을 못해도 다른 무엇을 잘하면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한 골을 넣고도 기뻐할 수 있는 경기가 있고, 세 골을 넣고도 울어야 하는 경기도 있습니다. 1대 0으로 이길 수도 있지만 3대 4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수학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누가 감히 영어를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영어만 잘하면 만사형통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닙니다. 영어를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 영문학을 전공하는 사람 외에는 영어는 도구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춘 뒤 영어가 덧붙여져야 쓸모 있는 것이지 다른 지식 없이 영어 구사 능력만 뛰어난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문 지식, 지혜, 사고력, 창의력이지 영어 그 자체가 아니잖아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어만 잘하고 다른 것은 못하는 사람보다는 영어는 못하지만 다른 것을 잘하는 것이 훨씬 낫잖아요. 스페인에 여행을 가서 만난 가이드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관광 가이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저에게 가이드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잘하면 좋지요. 그런데 가이드는 한국 사람들을 상대하고 한국 관광객들에게 스페인의 역사나 문화, 예술 작품, 관광지에 얽힌 정보를 설명하잖아요. 중요한 것은 역사, 문화, 예술 작품, 유적지 등과 관련된 풍부한 지식이에요. 스페인어가 아니고요.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스페인에 와서 조금만 노

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의사에게 필요한 소양은 의학 지식과 의술, 의료인의 양심이지 유창한 영어 실력이 아닙니다. 법조인에게 필요한 것 역시 법률 지식과 올바른 판단력, 양심이지 영어가 아닙니다. 아무리 국제화 시대라 하더라도 유창한 영어가 정말 필요한 사람은 국민의 5퍼센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함에

도 우리 사회에는 영어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영어에 목숨 거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영어를 배우느라 정작 중요한 우리말의 의미를 익히지 못하고, 영어 때문에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은 포기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필요한 상황에서 배워도 늦지 않고 필요를 느낄 때 학습해야 효율성이 높습니다.

 전문성과 창의성은 언제 키우고 나눔과 섬김과 봉사의 마음은 언제 키울까요? 이것들과 함께 영어 실력도 키운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능력과 시간의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모두를 이루어 낼 수 없다면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합니다.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영어 잘해서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축구 실력, 골프 실력을 갈고 닦은 뒤에 영어를 익혀도 늦지 않습니다. 또한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가 훨씬 쉽고 빠르고 재미있습니다.

 저는 지금 영어·수학 공부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잘못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영어만이 중요한 공부라는 생각, 수학·영어로 인간을 평가하겠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한창 나이에 수학 문제 풀고 영어 단어 외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낭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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