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이라는 영화가 오늘 또다시 생각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와 안타까움이 가슴을 짓눌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영화보다 더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가슴속 답답함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재벌의 횡포에 분노했겠지만, 저는 그보다 재벌을 옹호하는 비겁하고 못난 지식인들,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형사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재벌의 횡포보다 더 화가 났던 것은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권력자들, 재벌과 권력에 협력하는 비겁한 언론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머러스한 설정과 대사로 간간이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도 웃을 수 없을 만큼 답답했던 것은 영화 속 권력자와 언론인, 지식인들이 모두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답 찾는 방법, 점수 올리는 술수만 가르쳤을 뿐 정의, 자유, 평등, 평화, 공존이라는 단어는 외면하였습니다. 강자 앞에서 비겁하지 말고 약자를 따뜻하게 보듬으라고 말하는 대신 공부 잘하기만을 강요했고 공부 잘하는 방법만을 침 튀기며 알려 주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다고 야단쳤고 공부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강변했을 뿐, 양심에 따라 부끄럽지 않게 이웃을 돌아보며 용서하는 평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졸업 후 만난 제자들에게서 비겁함과 야비함을 발견했으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야단치기는커녕 웃음으로 얼버무렸습니다. 영어·수학 잘하는 사람보다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같은 정의로운 사람, 올바른 양심을 가진 경영자, 정의로운 일을 방해하지 않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
요한데, 이렇게 중요한 것들은 가르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공부 공부, 영어 영어, 수학 수학만을 외쳤습니다.
법조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인간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 보수와 혁신을 넘나들 수 있는 사람,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 등 여러 가지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 권력과 돈에 꺾이지 않을 양심과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법부에 대한 불신도 법에 대한 지식과 전문성 부족이 아니라 양심을 속이고 강자에 빌붙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어찌 법조인뿐이겠습니까. 정의와 양심은 정치인, 행정가, 의료인, 경영자, 교육자, 공무원 등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은 정의나 양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양심, 인권, 교양, 인성, 자유, 평등, 평화, 복지, 상식 등에는 관심 없고 오직 영어·수학만 중요합니다. 공부만 잘하면, 성적만 잘 나오면, 명문대에 입학하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돈 많이 벌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공부만 잘하면 싸가지 없어도 용서받는 세상입니다. 그 중심에 잘못된 교육이 있습니다.
줄 세우기가 목적이 되어 버린 교육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 돌을 던져야 합니다. 영어 단어 많이 외우고 어려운 수학 문제 잘 풀어야 건강한 사회인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양심 없고 용기 없는 아이는 공부 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 공부 못했으면 좋겠어요. 아직 사람이 덜 되었거든요. 싸가지 없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놈이 공부 잘해서 공무원, 정치인, 법조인, 의료인, 회장님 되면 안 되잖아요. 나쁜 사회 되잖아요.”
이런 부모를 만나고 싶은데… 아직 우리의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