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그런 행동을, 그런 말을 했을까? 지우고 싶은 과거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많은 일들이 후회와 반성으로 남습니다. 망각의 힘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쥐구멍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 봅니다. 부모님 마음 아프게 했던 것, 책을 읽지 않은 것, 학업을 소홀히 한 것,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 학생들에게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좀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것, 아내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 부모님께 살갑게 대하지 못한 것, 아들딸을 사랑으로 보듬지 못한 것, 모두 모두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40세, 미혹되지 아니함.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됨), 지천명知天命(50세, 하늘의 명령을 알게 됨), 이순耳順(60세, 귀에 순조롭게 들림.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에 대해 들으면 곧 이해가 됨)을 되뇌면서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하며 위로할 뿐입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부모님과 주위 분들께 참으로 많은 잘못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은 거의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들만 많이 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오십이 넘으면서 비로소 주위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고 학생들과 아들딸에게 화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눈에 보여도 ‘나도 그랬는데 뭘. 저 나이에는 다 그런 거지. 나는 훨씬 어리석고 이기적이었고 생각도 짧았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화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에 철든 사람이 열일곱, 열여덟 학생들을 철들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어떤 사람은 ‘다 지나가리라’라고 중얼거리면 걱정, 근심, 분노가 사라진다고 했는데 저는 ‘다 지나가리라’라는 말과 함께 ‘아직 철들지 않아서’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저만한 나이에 나는 저보다 더 못했지. 시간이 성장시켜 줄 거야. 나이 먹으면 철들 것이고 철들면 잘할 것이 분명해.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 용서하고 기다려야지. 다른 방법은 없어.’
젊은 교사 시절에는 화내는 것은 기본이고 수시로 체벌도 했지만, 철이 들면서는 체벌은 물론 화내지도, 큰 소리로 야단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년 초에 무섭게 대하여 아이들을 길들인다는데, 저는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체벌하지 않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마음 편하고 긴장하지 않고 자유로워야 재미있을 수 있고 재미있어야 공부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도 분노도 없어야 공부도 재미있게 할 수 있고 학교 생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내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맙게도 10여 년 동안 체벌하지 않고 큰 소리치지 않았어도 아이들은 잘 따라 주었을 뿐 아니라 학교 성적도 대학 입시 결과도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엄마의 아이 양육 방법이 많이 다르다고들 합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가능하면 손주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고 따뜻하게 대하는 데 비해, 엄마들은 원칙적이고 아이의 요구를 묵살하며 작은 잘못에도 화내고 야단치며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같을 터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할머니들은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는 누구라도 어리석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철이 들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야단치고 윽박지르고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진리, 큰 소리로 야단치며 꾸짖으면 오히려 엇나가지만 사랑으로 보듬어 주면 멋지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단 경력이 쌓여 갈수록 교육에는 정답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똑같은 땅에서 같은 주인의 보살핌으로 자랐지만 어떤 나무는 크고 맛있는 열매를 맺고 어떤 나무는 작고 맛없는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방법으로 교육하였음에도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지도했음에도 제각기 다른 결과를 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능력을 의심하기보다는 인간은 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지 누군가가 도와준다고 좋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이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용서와 믿음과 기다림의 위대함이 그것입니다. 진심으로 용서하고 기다렸더니 아이들은 보답해 주었고, 용서해 주었더니 인간답게 성숙해 갔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잘못과 실수를 확인하고서도 화나지 않고 걱정도 되지 않는 이유도 아이들은 그 잘못과 실수를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화가 나려고 할 때면 저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그 나이에 얼마만큼 인간다웠고 얼마만큼 철이 들었으며 얼마만큼 알고 있었느냐?’
우연히 어떤 책에서 가슴에 다가온 말을 발견하고,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해 줄까 고민하다가 네모 칸 넣기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문항을 칠판에 쓰고 아이들에게 답을 생각해 보라고 한 뒤, 괄호 안의 답을 하나씩 맞춰 나갔습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두려움)
가장 좋은 날은 바로 (오늘)
가장 무서운 사기꾼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
가장 큰 실수는 (포기)해 버리는 것,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남)을 (미워하는) 것
가장 어리석은 자는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사람
그리고 잠시 후 가장 중요한 문항이라고 이야기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선물은 ( )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랑’이라 외쳤지만 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 때쯤 ‘ㅇㅅ’을 적었더니 한참 후에 한 아이가 ‘용서’라고 이야기하였고, 그러자 고맙게도 아이들 모두 저에게 정답을 확인하지도 않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