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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Mar 12. 2020

사주팔자를, 봄

이번 봄에도 나는 사주팔자를 보러 갈 생각이다

봄바람이 살랑대며 불어온다. 죽을랑 말랑 지쳤던 마음이 금세 살랑거린다. 겨울바람은 사람을 때리고 움츠러들게 하지만 봄바람은 어깨를 쭉 펴고 한껏 공기의 냄새를 맡게 한다. 봄바람은 축 처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바람이다. 어떻게 살아볼까 다짐하게 만드는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봄이 되면 사주팔자가 보고 싶어진다.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면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이 샘솟는다. 어떻게 해야 더 잘 살 수 있을까. 올해는 별일 없이 지나가려나. 내일을 또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까. 그렇게 궁금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철학관을 찾아가본다.


사주팔자를 처음 본 건 신입사원 때였다. 회사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았던 꽤나 유명한 철학관을 갔다. 그곳에서 선생님이 내게 건넨 첫마디는 이랬다. "당신은 큰 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만하고 잘난 부분이 있어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제가 남의 말은 덜 듣고 제 말만 더 많이 해서 늘 혼난다는 걸 어떻게 아시고 이런 말씀을.


나의 사주를 친구들이 대신 봐준 적도 있다. 회사 일이 바빠 약속한 일정에 철학관을 가지 못하게 되자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들이 나 대신 선생님의 사주풀이를 녹음해왔다. 그런데 왠일. 친구들은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음성파일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녹음 파일 속 한 남성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코올성 치매로 일찍 생을 마감한다니까. 끼는 많은데 안타깝네." 아이고 선생님, 제가 술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지금의 연인과 궁합을 보러 같이 간 적도 있었다. 서로의 성향이 잘 맞는지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일찍 결혼하면 이혼할 사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담동의 어느 건물에 위치한 방 한 켠에서 세 번째 선생님이 내게 건넨 말은 이랬다. "결혼이든 동거든 두 분이서 하고 싶을 때 알아서 하세요. 어떻게 만나도 좋으니까."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사주팔자란 미신에 불과하다고 이런 나를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신일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나는 사주팔자를 좋아한다.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인 만큼 어떤 얘기라도 쉽게 주고받을 수 있고 허심탄회하게 잊어버릴 수 있다. 맞으면 맞는 대로 신기하고, 아니면 아닌 대로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적어도 나는 경청의 중요성과 금주의 필요성과 마음 놓고 사랑하라는 조언을 복비로 들은 셈이다. 초면에 알코올성 치매로 일찍 죽을 거라고 내게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연인과 동거해도 상관없다고 말해주는 나이 많은 어른이 또 얼마나 많을까.


ⓒ unsplash


이번 봄에도 나는 사주팔자를 보러 갈 생각이다. 봄바람에 실려온 '잘 살아볼까'라는 마음을 잠시 철학관에 맡겨 볼 것이다. 봄은 짧으니까. 언제 왔나 싶다가도 언제 갔나 싶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니까. 이번 봄에는 귀인을 만나게 되거나 말거나. 올해 운세가 좋거나 말거나. 나의 인생을 점쳐주던 얘기들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 사라질 것이다.


일본의 시인 다네다 산토쿠는 하이쿠로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봄은 달아나 버렸다."


거짓말처럼 사라질 봄이기에 거짓말 같은 조언에도 잠시 귀를 기울여보는 것.

봄에는 그런 것들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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