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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an 26. 2023

나 자신을 찾아 떠난 중국 유학 2-1

"인생은 과감한 모험이던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헬렌 켈러


마음속으로 휴학을 결정하고 부모님께 휴학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많이 지친 상태라 부모님과는 미리 상의를 드리지 않는데 부모님께서는 그동안 안쓰러웠는지 조금 쉬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한번도 반대를 한적이 없으셨다. 다만 아버지는 나에게 휴학을 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고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중국으로 가서 중국어 공부도 하고 중국의 경제도 한번 관찰하려고 합니다. 쉬더라도 중국에서 쉬는 것이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요. 중국은 학비와 물가가 싸서 한국에서 쉬는 것 보다 더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미리 중국에서 드는 생활비, 어학연수 비용 등을 찾아서 계산해 놓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자신있게 말하였다.


"그래 1년간 잘 다녀와라. 나 또한 중국에서의 경험이 앞으로 너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내가 이미 계획을 세워오자 자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휴학을 준비하면서 나는 좀더 새롭고 의미있게 쉬고 싶었다. 쉬더라도 배움이 되는 쉼을 원했기 때문에 한국에는 돌아기가 싫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일단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 나라는 중국이었다.


왜 중국이냐고 물어본다면 2007년 1학년 당시 중국 경제가 떠오르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중국 경제에 가르치고 있었다. 경제 경영학, 정치학 교수님들은 중국이 앞으로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도 가깝고 중국에 내가 모르는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일단 무작정 가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어디부터 갈 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어미니의 친척 형이 중국 연길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그 형에게 전화를 걸어 그 집에서 살면서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고 다행히 그 학교에서는 중국어 수업을 열고 있었다. 나는 일단 반년간은 그곳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연변을 간 것은 처음에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후에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연변은 즉 우리의 조상들이 살던 우리의 고토, 즉 만주땅이었다. 그곳에는 우리 역사의 숨결과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중국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내 일생을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다.


중국 연변에 도착하다


중국 연변의 공항에 처음 도착하자 친척형과 중국 동포인 제자들이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처음보는 낯선 풍경이 흡사 내가 북한 평양에 도착한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중국 동포 제자들은 내 나이또래였는데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친척 형을 돕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소형 벤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신기하게도 시내의 간판은 중국어와 내가 잘 아는 한국어가 같이 쓰여있었다.


'이런 곳도 있구나. 신기하다'


집으로 가다가 인사나 할겸 중국 동포 학생에게 말을 걸어보았는데 그들의 말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북한 억양과 비슷한 사투리였다. 차에서 내릴 때 중국 동포 여성분이 내 짐을 들고 있길래 내가 들기 위해 달라고 말하였다.


"일 없습내다"


약간은 딱딱한 말투로 이 말을 하자 매우 낯설었다. 정말 흡사 내가 북한에 온건가....


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중국 동포들에게 호기심이 났다. 그들은 누구이고 왜 우리말을 쓰고 있는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다


내가 묵을 집에 도착하니 형수님과 두명의 중학생, 초등학생, 대학생 아이들이 있었다. 내 사춘동생들이었다. 그들과 인사를 하고 내 방에서 쉬면서 중국에서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인지 생각하였다. 일단 중국에 온 이상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중국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을 관찰하기 위해 중국을 일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중국어 수업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이미 내 또래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이미 외로움이 익숙해진 터라 유학생들과 크게 어울리지는 않았다. 중국어 공부는 대학에서 이미 한 과목을 들은 터라 수업을 듣기 조금 수월했지만 인사 정도의 기초만 알 뿐이었다. 중국어 수업이 끝나자 중국어 선생님이 나에게 연변과학기술대학에 다니는 중국 대학생을 과외선생님으로 구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과외 과격이 정말 말도 안되게 쌌다. 연길 지방 대학생 한달 아르바이트비용이 10만원 할 때였다. 나는 한달에 10만원씩 매일 2시간씩 공부하는 조건으로 대학생 과외 선생님을 구했다.


첫번째 과외 선생님은 나와 동갑이었던 중국 한족 여학생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친구는 한국말을 거의 원어민처럼 했다. 물어보니 연변과학기술대학이 한국에서 세운 학교였고 한국 교수들과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라고 했다. 가끔씩 이런 언어의 천재들을 만났고 그녀가 중국어를 잘 가르칠 것이라는 확인이 들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중국어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과외 선생님을 만나 열심히 공부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매일 열심히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었는데 아직 중국어를 잘 모르다보니 그녀가 한국어로 설명해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중국어는 성조가 매우 어려웠는데 중국 한족 과외 선생님이 매일 발음을 봐주었기 때문에 발음이 매우 좋아질 수 있었다.


이렇게 낯선 땅에서 평범하게 3개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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