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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an 27. 2023

중국 최고의 지성 칭화대에서 만난 중국 학생들 2-5

중국의 수도 북경으로 가다

2008년 후반기 나는 6개월간의 연변 생활을 마치고 북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연변과 이곳 사람들과 정이 들었지만 연변이 있는 동북 3성은 중국에서 변두리 지역이었다. 중국에 왔으면 북경에 가는 것이 중국을 잘 알려면 당연히 해야하는 선택이었다.


나는 중국어에 대한 기초를 여기서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연변에서의 3개월 후 과외 선생님도 한명 더 늘려서 하루에 4시간씩 중국어 과외를 받았다. 과외를 많이 받은 이유는 혼자 하는 공부가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 과외 선생님들이 내 또래였기 때문에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제 북경에서 다시 중국어 공부를 이어가면서 북경과 중국에 대해 관찰하고 경험하고 싶었다.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커가고 있는지 그리고 명과 암이 없는지. 또 어떻게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응해야 하는지 여러모로 궁금하고 알고싶어졌다. 나는 일단 북경 칭화대에 중국어 어학연수 과정이 있다는 것을 듣고 지원하였다. 칭화대로 간 이유는 중국 최고의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생각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6개월간의 중국어 수업에 등록할 수 있었고 칭화대 안에 학생 기숙사에도 배정을 받았다.


연변에서 친척형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북경으로 왔다. 북경의 공항은 연길 공항과 스케일이 달랐다. 택시를 타고 칭화대를 가는 도중에 창밖을 바라보자 높고 큰 건물들이 보였다. 그 당시 북경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도시는 상당히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칭화대는 북경의 우다코우라는 곳에 있었다. 우다코우는 지역 이름인데 우리나라의 구 정도인 것 같다. 우다코우에는 북경대와 칭화대가 있어서 유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그 근처에는 이화원이라고 서태후가 만든 엄청 크고 아름다운 황실의 정원도 있었다.


칭화대에 도착하여 기숙사에 짐을 풀고 다음날 수업에 나갔다. 간단한 레벨 테스트 후 나는 중급반으로 배정되었다. 우리반에는 영국, 브라질, 일본, 미국, 호주, 프랑스, 말레이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중국어를 공부하며 북경의 여러 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북경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 당시 이미 나는 노는 것을 절제할 수 있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단련된 마음이었다. 북경에서는 삶을 즐기면서 공부하자는 생각이었다.


칭화대 중국어 반의 나


나는 소속이 칭화대 대학생이 아니라 어학연수반이었기 때문에 칭화대 중국 학생들과 사귀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는 많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유학생 행사를 통해 중국 칭화대 학생들과 함께 만날 기회를 주었고 한국어에 관심 있는 중국 학생들을 찾아 그들과 만나 교류하였다. 때로는 몰래 청강도 하면서 한두명씩 중국 친구들을 만들어갔다.


칭화대 기독교 클럽에 가입하다


우리반에 미국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특이하게도 영어를 절대 안썼다. 중국어도 잘 못하는데 매일 내가 영어로 말을 거니 자신에게 중국어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친구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어찌되었든 그 친구와 떠듬거리는 중국어로 매일 말을 하였고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만든 기독교 클럽에 가입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Why not?" 나는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 클럽에 가입했고 모임에 나가자 칭화대 중국 학생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종교를 믿는다는게 거의 목숨을 거는 일인데 신기하다 싶었다. 아무래도 그 당시 미국 유학생들이 드물었는데 칭화대 학생들은 그 친구가 궁금하거나 영어를 배우고 싶었나 보다. 그 미국 친구가 사실 선교하러 중국에 온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종교 탄압이 심했는데 내가 교회를 갈 때도 현지 교회에는 출입이 안되고 국제 교회에만 갈 수가 있었으며 그마저도 여권 등 신분증을 보여주고 들어갈 수 있었다. 선교를 하면 바로 추방이었다.


모임에서 미국친구가 한명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자고 했다. 특이하게도 이 미국 친구는 여기서는 영어만을 썼다. 아무래도 중국 친구들과 소통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한명씩 영어로 기도하였고 내 차례가 되자 나 또한 영어로 기도하였다. 내 기도를 듣던 미국친구는 나를 보며 놀란듯이 외쳤다.


"승철, 너 왜이리 영어를 잘해?"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가 영어를 못쓰게 하니까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야"


이후로 나는 매주 영어모임을 가지면서 이 중국 칭화대 학생들과도 친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만났던 중국 칭화대 학생들과 점심 식사도 하고 저녁 식사도 하면서 그들과 많은 대화를 하였다. 대부분은 영어로 하였는데 그들에게 주로 물어본 것은 중국의 정치, 사회, 경제 등에 관한 그들의 소견이었다. 그들은 매우 순박했지만 자신의 나라에 대해 매우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이 언젠가는 미국을 넘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친구들에게 교만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친구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친구들보다 순박했고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이제 깨어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중국에 많은 의존을 하게 될테고 그러면 전통적인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십년이 지난 후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사이에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애매모호한 눈치보기 전략이 탄생하고야 만다.


중국은 제국을 한번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다만 내가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종속시켰다는 역사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이 힘을 기를 수록 예전의 중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어떻게든 손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경제적 번영과 힘의 축적은 우리나라에는 좋지 않은 의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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