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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an 29. 2023

네?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라구요? 3-2

일본이 바라보는 위안부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나는 니시카사이라는 곳의 기숙사에 살았는데 일본인 기숙사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정말 좋은 분이었다. 기숙사에 있는 동안 꼭 자녀에게 하는 것처럼 잘 대해주셨다. 기숙사 식당에는 또 겨울연가의 박용하를 너무 좋아하던 일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매일 나 늦게 다니는 나의 저녁밥을 챙겨주셨다.


나는 같은 호세이대학 외국 교환학생들과 같이 살았는데 호주, 미국, 프랑스, 호주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특히 나는 호주에서 대학을 다니기 때문에 호주 친구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일본 기숙사 주인 아저씨와 교환학생 친구들


호세이 대학은 이다바시라는 역 바로 앞에 있었는데 역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운하가 펼쳐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전 성터 주변의 해자였다. 봄이 되면 수백그루의 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가끔씩 운하 위에 떠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봄의 정취를 느꼈다.


호세이 대학 (출처 : Japan-universities.com)


교환학생들은 일단 일본어에 자신이 있으면 일본어로 된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아니면 호세이 대학의 국제학부에서 제공하는 영어로 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일본어로는 당장 듣기 어려웠기 때문에 영어로 된 수업을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본 근대역사,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금융 등 일본과 관련된 다양한 과목을 신청하였다. 그 과목에는 일본 국제학부 학생들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본 학생들과 금방 친해졌다. 처음 두달동안 친해진 일본 학생들과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주변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들과 어울렸다. 우리는 국적이 달랐지만 서로 존중하며 지냈다. 수업을 듣다 이상형인 일본 여대생을 만났는데 만날때마다 농담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후 몇번 데이트도 했지만 그때까지 너무 쑥맥이어서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이어가지는 못했다. 일본에서의 대학생활은 평화로웠다.


반원전 운동권에 나도 모르게 가입하다


2011년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난 해였다. 그러다보니 일본 운동권 학생들이 반원전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운동권 학생들이 어디에 싸인을 해달라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싸인을 해줬더니 며칠 후에 문자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일본 학생들과 친해지고자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운동 사무실같은 곳에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더니 한명씩 반원전에 대해 발표를 하는 거였다. 자연스럽게 내 차례가 되자 그들이 나에게 한마디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영어로 원전 반대에 대한 내 의견을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일본의 모든 국민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나는 원전의 위험성을 이번 사고를 통해 잘 알았고 원전의 운영과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사실 깊게 생각한 멘트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 말을 듣더니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이렇게 갑자기 일본 운동권의 끈끈한?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그들의 활동에 부담스러운 나머지 활동을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가 우리 학교 옆에 있다


어느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좀이 쑤셔서 산책이나 할겸 학교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학교 뒷문으로 걸어나가자 북한 대사관 같은게 있었다. 조금 놀랐지만 더 올라가니까 갑자기 공원 같은게 나왔다. 엄청 오래된 단풍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는 와중에 늦가을이 쯤이라 노란 단풍이 바람에 날려 장관을 이루었다. '엄청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앞에 사당같은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야스쿠니 신사였다.


'세상에 뉴스에서만 보던 야스쿠니 신사가 바로 우리 학교 옆에 있었다니...'


간판을 못봤으면 정말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인 줄 알았을꺼다.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보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일본은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었을까... 나는 그 후로 가끔씩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와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러곤 이곳을 볼때마다 두번다시 우리나라가 고통받지 않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하였다.



위안부는 자발적,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나는 일본 정치수업에서 일본 근대사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나는 25명의 학생들 중 유일한 외국인이자 한국인이었다. 나머지 24명은 일본인 대학생들이고 평소에 나와 친한 내 일본 친구들이었다. 그날이 세번째 수업인가 그랬는데 일본 근대사에서 일제 강점기 쪽으로 넘어가는 단락이었다. 일본인 교수님은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위안부는 한국여자들의 자발적인 행위였다고 자료를 들어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일본 교수는 자료를 보여주며 1944년 일본은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거금을 준다고 하는 보도 자료를 뿌렸다고 말했다. 또한 강제 연행된 문서화된 증거가 없다는게 핵심 논리였다. 예전에 뉴스에서 일본은 우리와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일본 역사 교육은 정말 저렇구나... 교수의 눈빛에는 사실 악의는 없었다 그저 일본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꼭 우리가 이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교수님은 한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이 문제는 좀 민감한 사항이지만 예전에 제가 읽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할머니는 17살때 일본인이 와서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면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그 사람을 따라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트럭에는 그녀와 같은 상황의 조선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을 데리고 간 곳은 일본군인들의 진지 였습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강제로 하루에 많게는 30명씩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망가거나 임신이 되면 그자리에서 칼로 찔려 죽는건 다반사여서 그녀들은 그곳에서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날무렵 일본군은 위안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한 사람의 일본군 간부가 탈출하라고 미리 알려주어 탈출 할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들은 몸이 망가져 임신도 못하고 평생 결혼도 없이 쓸쓸히 살아야 했습니다."


같은반의 일본 여학생들은 때로는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으리라. 내 말이 끝나자 교수님은 내 말을 받아 들여 자발적인 행위도 있었지만 조금은 강제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그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감정적으로 그들을 움직인게 조금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의식은 역시 다르구나 느꼈다.


어느날은 프레젠테이션에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라고 하면서 안중근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교수님은 나에게도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주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안중근은 우리의 영웅이자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인이라고...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인 교수와 일본인 학생들은 내 의견을 잘 이해해 주었다. 이 수업 이후로 교수님과 일본 학생들은 일본의 입장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을 잘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처음보다는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교수님은 우리가 역사적 마찰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한일 양국이 함께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 이후에 나는 한국의 자료들을 구하며 위안부와 독도에 관련하여 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일본 학생들의 인식 개선에 노력하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건 비단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능했고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일본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일본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을 바꾸기는 힘들다. 그 것은 이미 어렸을때부터 보편적인 교육으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일 문제를 접근하려면 우리는 이 역사 교육부터 수정을 요청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은 아마 좁혀지는게 힘들 것이고 갈등은 상당히 오랜기간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나는 역사 의식과는 별개로 실리를 챙기기 위한 경제적인 협력은 전략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역사의 과오에 대해 일본에게 백번이고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결국 이때 뼈저리게 느낀 점은 나라가 부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냉혹한 현실의 국제관계 앞에서 우리는 언제 또 다른 나라에 의해 고통받을 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고 항상 경계하고 항상 부강해야 한다. 부단히 힘을 기르는 것만이 국민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역사왜곡 #안중근 #일본 #근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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