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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an 30. 2023

정말로 힘들었던 4개월의 훈련 4-2

공군장교 시험 공부를 하고 있을때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 2시간 정도 신림동의 개천에서 달리기를 하고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두달 정도 한 것 같다. 나의 체격은 또래 남자들보다 작았고 3차 체력시험에도 대비해야하기 때문에 꽤나 진지하게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입영날 가족과 나는 공군훈련소가 있는 경남 진주로 내려갔다. 살고 있는 용인에서 몇시간이나 걸려서 진주에 도착하였고 훈련소 앞에서 대기하며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미 나이는 이십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었지만 군대 훈련소 입소를 앞둔 마음은 한편으로는 기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많이 되었다. 또래에 비해 작고 약한 몸과 해외에서 지내서 한국분들과 조금 다른 문화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뿐이었다. 하지만 인내심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훈련소 문이 열리고 나와 같이 모인 젊은이들이 같이 훈련소에 들어갔다. 다들 가족에게 인사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소리내어 우셨다. 성인이 되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나는 그저 소중한 아들인가보다.


우리는 열을 맞추어 강당 어디론가 들어갔고 그때부터 얼차려가 시작되었다. "야이 새끼들아" "후보생 엎드려" "내려와 올라와" "옆으로 굴러 좌로 굴러" 하면서 우리는 팔굽혀펴기와 옆으로 구르기에 혼이 나가 있었다. 다행히 예전에 듣던 것처럼 심한 욕이나 폭력은 없었지만 다들 사회에서 학력으로나 직업으로나 한가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을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훈련이었다. 실제로 회계사, 로스쿨 학생, SKY생, 외국 명문대, 5급 공무원, 약사 등등 사회에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한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저 우리는 훈련생일 뿐이었다. 실제로 한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30%정도 된것 같다. 다음날 체력 시험을 본것 같은데 다행히 입대 전 열심히 운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체력 시험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우리는 10분 안에 군복을 입고 튀어나와 운동장에 서서 인원체크까지 맞춰야 했다. 다들 처음이라 실수가 있었고 하루종일 우리는 바닥의 껌과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하루종일 운동장을 구르고 종일 차렷자세로 서있기를 반복했다.


훈련과 교육은 다양했다. 전술을 배우기도 하고 총검술, 수류탄, 사격 등을 배웠고 늘 수업의 시작은 30분 한시간 동안 이어지는 얼차려였다. 훈련장소를 이동할 때는 거의 기어서 가거나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식사 시간에도 밥을 먹다가 교관의 눈과 마주쳤다는 이유로 나는 식사도 못하고 식당에서 얼차려를 받았다. 그렇게 훈련 이주일째 드디어 우리는 종교 행사에 갈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기독교이기 때문에 교회를 갔고 교회에 앉고 기도하자마자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주변을 보니 다들 울고 있었다. '다들 정말 힘들구나'


사회에서 먹고 싶었던 과자나 탄산을 훈련 3개월 동안 전혀 먹지를 못했다. 하지만 훈련 후반기부터 가끔씩 과자와 탄산을 나누어주면서 그때부터 정말 살것 같았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훈련은 행군이었다. 4, 5일정도 매일 행군을 했는데 평지가 아니라 20kg 배낭과 총을 들고 등산을 했다. 산길로만 다니는데 그 당시 소대장을 하고 있어서 내가 맨 뒤에서 인솔을 하느라 정말 죽는줄 알았다. 행군은 맨 뒤에 있을수록 힘이 든다. 행군을 끝나고 종아리에는 벌써 단단한 알이 잡혀있었다.


또 훈련 중에 기억나는 것은 입소 후 얼마 안되었을때 얼차려로 총을 머리 위로 아래로 움직이고 발은 뛰면서 이걸 이천개 삼천개씩 시켰다. 지금생각하면 아찔했지만 다들 해내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 싶었다.


소대장이 되다


나는 나이가 훈련생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축에 속했다. 27살이었는데도 대부분 나이가 23-25세 사이였고 그래서 그런지 배우는 것도 약간 꿈뜨고 체력도 부족했다. 나는 학창시절에 반장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리더십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소대장에 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다른 친구가 소대장을 하고 싶어했고 정말 인기가 많은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일일히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 소대장이 되고 싶은 이유를 말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게 내 첫 선거였다.


다들 투표를 한다음 박스 안에 있는 종이를 하나씩 빼면서 이름을 불러나갔다.


"옥승철", "신일지", "신일지", "신일지" 이렇게 내 이름이 거의 초반에 들리지 않았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옥승철" "옥승철"하면서 내 이름이 많아졌다. 다행히 근소한 차이로 내가 득표에서 이겨서 소대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라이벌인 다른 친구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한 것을 놀라워했다. 나도 사실 이길 줄은 몰랐다.


소대장이 된 이후에 동기들을 통솔해야 했다. 우리 소대는 1중대 3소대였는데 항상 밥을 먹으러 가나 훈련 받으러갈 때 오와 열을 맞추고 구령을 넣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옆에서 통솔하면서 구령을 넣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구령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동기들이 대신 불러주기도 하였다. 지금생각해보면 부족한 소대장이었지만 다들 나를 잘 챙겨주었다. 나 또한 어디서 들은게 있어서 서펀트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으로 동기들을 잘 챙겼다. 이렇게 좌충우돌 소대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자대배치


마지막 훈련으로 갈 수록 체력이 좋아졌다. 이제는 다들 슈퍼맨이라고 할 정도로 총을 대여섯개씩 손에 들고 어깨에 걸쳐메고 20kg 군장을 메고 10키로 이상 오와 열을 맞추어 뛰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통나무를 드는 건 이제 장난으로 할 정도가 되었다. 이대로 전쟁에 투입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쯤 훈련이 끝났다.


자대배치는 훈련 점수로 받는데 나는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수도권인 파주의 공군 레이더 기지로 배치를 받았다. 사실 나는 춘천에 있는 기지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파주에 가려는 친구가 나와 선택지를 바꾸어 주었다. 왜 바꾸어 주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서울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춘천이 좀더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파주에 집이 있는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선정까지 끝난 후 나는 소위 뺏지를 달고 정식 공군장교로 임관하였다. 부모님이 오셔서 축하를 해주셨고 아버지는 공군장교가 된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떻게 4개월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물론 특수부대의 훈련이 비해서는 약할테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정말 정신력과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해준 훈련소 생활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우리 소대는 자대를 배치받고 뿔뿔히 흩어졌다. 4개월간 동고동락한 소대원들과는 그 이후로도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 더 무시무시한 장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이때는 정말 몰랐다.


#공군장교 #공군 #훈련소 #훈련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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