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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an 30. 2023

날라리 유학생, 대한민국 공군장교가 되다 4-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2년 동안 휴학은 마치 잠시 꿈을 꾸고 깬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호주의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오니 과연 내가 2년동안 중국 일본을 다녀온게 맞는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명 많은 경험을 했는데 2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성숙해졌는가?'에 대한 물음에 제대로 답은 할 수 는 없더라도 분명한 한가지는 내 삶의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 분명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꿈이었다.


호주는 참 평화로운 나라이다. 날씨도 매우 따듯하여 겨울을 제외하고는 밖에 나가면 조금 몽롱해졌다. 길 가다가 잔디밭에 누워 한숨 자도 될만큼 여유있고 평온한 나라였다. 하지만 대학 공부에 있어서는 전투적으로 공부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100점만점에 65점을 넘으면 크레딧이라고 부르고 공부를 좀 했네 정도 들을 수 있었고 75점이 넘으면 공부 진짜 잘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85점은 거의 신의 레벨이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65점 안팎을 왔다갔다하며 어려운 과목들은 50점 이하를 받기도 한다. 50점 이하를 받으면 재수강을 해야했다. 재수강을 하는 것은 돈도 들고 시간도 드는 일이었다. 나도 부끄럽지만 1학년때 50점 이하로 받은 과목이 하나 있어서 재수강을 했다. 유학생 모임에서 술을 마시다 안 사실은 어떤 분은 10과목을 재수강 한 분도 있었다.


중국 일본에서 지내다 돌아와서 한학기가 남았을 때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보았다. 그 당시 일단 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외무고시 공부를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였다. 호주에서의 6개월이라는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흘렀다. 마지막 과목들은 점수도 나쁘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1학년때와 정말 다른 점은 이제는 공부를 여유를 갖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요령이 생기니 공부가 크게 부담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공부가 재밌어졌다. 특히 경제학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학교 교과서 외에도 인터넷, 그리고 한국에서 경제 관련 책들을 부모님께 보내달라고 해서 따로 공부하였다.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을 얻을때마다 공부가 너무 재밌어졌다. 공부가 재밌어지다니 드디어 내가 미친 것인가...


떠날때가 되자 나는 교회분들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정말 고생도 많이하고 애증이 있었던 호주 유학생활이었다. 눈물을 흘렸던 적도 많았고 웃었던 적도 있었다. 호주에서의 절망의 시간, 기쁨의 시간, 고통과 인내의 시간 그 시간이 모두 흘렀고 그 시간동안 나는 인내하고 인내하며 버텨내었다. 남들보다 조금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인내하고 버티고 느리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호주여, 그리고 시드니여 안녕!"


신림동에서 공군장교에 지원하다


호주에서 돌아오고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일단 신림동에 있는 고시촌으로 갔다. 부모님은 내가 외무고시를 보는 것에 찬성을 하셨지만 꾸준한 공부와는 약간 멀어보이는 내 모습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신림동에 들어가 반년 정도 공부하였다. 왜 반년이나면 들어가자마자 군대를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군대를 갈 때가 되었구나'


사실 군대를 가는 것은 이미 늦은 나이였다. 그 당시 나는 26살이었고 군대는 보통 20살이나 21살때 많이 가기 때문이었다. 20살 초반에는 외국 영주권 시민권을 얻어 군대를 빠지려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에 나는 꼭 군대를 제대로 가고 싶어졌었다.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우리나라의 리더로서 꼭 해야하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국가를 이끌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 나라를 지켜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해 일하겠는가...


일단 입영통지를 받았고 나는 이왕 가는 군대를 조금더 뜻있게 가고 싶었다. 일본 교회에서 만난 하버드에서 박사를 나오고 동경에서 경제학 교수를 하는 지인분에게 고민을 말씀드렸고 그분은 나에게 주변 남자분들이 공군학사장교를 많이 가고 만족도도 높으니 한번 지원해보라고 하였다. 다만 공군학사장교는 경쟁률이 심했고 보통 SKY출신과 해외대학 출신들이 많이 지원하기 때문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신림동에 있는 마지막 2달 동안 시중에 모든 문제집들을 모아서 풀었다. 대략 10권 정도 풀었고 풀다보니 문제집의 문제들이 겹친다는 것까지 발견하는 수준까지 간 다음 시험을 보았다. 시험은 언어논리, 공간능력, 지각속도, 상황판단, 직무성격, 국사, 영어였는데 아마 그당시 영어는 토익으로 제출하였고 나머지는 외무고시 1차와 비슷하여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수학같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평소 수학을 잘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결국 시험에 통과하고 인터뷰를 보았다.


인터뷰는 왜 공군장교가 되고 싶은지 그리고 남북한 안보, 미래 전쟁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2차까지 통과하고 나머지 3차 체력시험은 훈련소에 입대하고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결국 2차까지 통과가 최종 합격과 다름이 없었다.


부모님께 장교시험을 합격했다고 말씀드렸는데 매우 좋아하셨다. 입대하고 안 사실이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공군학사장교에 들어간게 정말 의외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유학생활을 오래했고 체격도 크지 않고 온순한 성격이라 군대를 가기 싫어할줄 알았는데 공군학사장교를 지원하는 것을 보고 정말 부모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라고 생각했다. 이 결정이 네 인생에 큰 축복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3년 공군 장교 임관


사실 이 결정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키도 작고 체격도 작고 성격도 소심한 나에게 장교로서 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고 내 성격을 남자답게 그리고 리더로서 변하게 해준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나에게 내가 공군학사장교를 다녀왔다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하신다.


나는 입영 날짜가 잡히자 신림동에서 공부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군대를 간 이상 외무고시는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려놓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 조차도 몰랐다.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이제 점점 입영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군학사장교 #군대 #장교 #호주 #시드니대학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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