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지 6개월이 지났다. 일단 호세이 대학은 6개월이었고 다음학기 연장을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장을 신청하지 않고 일본어 공부에 집중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일본어 어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머지 6개월간의 어학연수 생활은 평범하였다. 일본어 학원은 동경 YMCA 일본어 학교에 다녔는데 YMCA는 1906년 일제의 강압적 지배가 시작되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한국으로부터 온 유학생들을 보호하면서 일본어 교육, 하숙생활지원 등의 활동을 한 단체였다. YMCA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실제 YMCA에 가면 독립기념관실이 있다.
YMCA 어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교회 생활 또한 열심히 하였다. 호세이 대학에 다닐때도 그랬고 YMCA 어학원을 다닐 때도 수업이 끝나면 매일 잠시라도 교회에 와서 기도를 했다. 20대의 나는 다른 또래 청년들처럼 항상 미래에 대한 마음에 불안이 있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평생 할 기도를 다 한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 많이 안하나보다... 기도 거치 예금을 들어놨다랄까...
후쿠시마로 봉사활동을 가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경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후쿠시마 근처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일이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꽤 떨어져 있는 이와키시에는 쓰나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을 잃어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거주지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교회에서 함께 하루 봉사활동에 가기로 하였고 동경에서 몇시간 뒤 이와키시로 들어가자 많은 난민 분들이 살고 있었고 노인들도 있었고 아이들도 뛰어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으로 가져간 물과 음식 재료들을 꺼내 난민 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곳에서 난민 분들과 다같이 모여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했다. 일본 아주머니들은 샐러드를 만들면서 토마토를 토끼 귀 모양으로 깍는 멋과 여유를 잊지 않았다. 일본 아저씨들은 계란 말이를 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본 계란말이중에 가장 정통식 일본 계란말이였다. 낯선 외지인들이 왔지만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반가워해주었고 함께 웃고 즐거워했다. 사람들이 웃고 즐거워하자 내 마음도 함께 즐거워졌다.
나는 일본의 극우들이 싫은 것이지 일본 친구들과 일본 난민 분들이 싫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그 누구던 약자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인류애가 있었다.
청년으로서 본 일본의 좋은 점 들
그래도 일본에서 좋았다고 생각되었던 점들은 일단 사람들이 정말 질서를 잘 지켰다. 어디가서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말 줄을 잘 서있었고 특히 버스에 탔을 때 운전기사님은 승객들이 다 앉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두세번 확인하고 출발한다는 말을 하고 출발하였다. 얼마전 한국에서 버스를 탔는데 앉기 전에 급 엑셀을 밟아 넘어질뻔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나라도 안전을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잘 지켜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램이었다. 일본이 밉지만 배울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과 시민의식은 디테일에 있다.
일본은 또 학생이면 한달에 정해진 구간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정기권을 반값에 살 수가 있었다. 유학생도 마찬가지로 할일은 받을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였다. 돈이 항상 부족했던 유학생활에 덕분에 교통비 걱정 안하고 다닐 수 있었다.
일본은 또한 물가가 생각보다 저렴했다. 항상 마트에서 장을 보면 우리나라보다 저렴하고 생각했다. 이후에 영국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느낀거지만 마트 물가는 우리나라가 이상하게 더 비쌌다. 한국에 돌아왔을때 편의점 물가 또한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비싸다고 느껴졌다. 요즘은 포도를 한송이 사려면 만원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참 서민이 살기 힘든 나라이다.
일본을 떠나며
이렇게 일년 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호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나에게 일본이란 나라를 알게 해주었고 서로 역사를 인식하는 그 간극이 꽤 크다는 것 또한 느끼게 해주었다. 아마 그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재일 교포들의 삶 또한 나에게는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다.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나라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나와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는 모든 해외 동포들 그리고 그 2세 3세들까지 우리가 함께 보살펴야 할 우리의 민족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큰 나라가 되려면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는 급속도로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특히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이 그렇다. 청년들이 희망을 잃으면 경제 성장의 엔진을 잃는 것이다. 청년들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기 전에 우리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다시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학교 친구들과 교회 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제 다시 호주로 간다. 이렇게 내 인생의 3막이 마무리가 되었다'
"일본이여 안녕"
#일본 #청년정책 #반값전철 #재일교포 #동경교회 #후쿠시마 #원전 #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