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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승철 Jul 03. 2022

1편 : 아웅산, 영국, 일본 그리고 미얀마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미얀마로 떠나다

2018년 6월 나는 옥스퍼드 공공정책 석사과정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한 정책 연구를 위해 미얀마로 가는 것을 결정하였다. 졸업요건은 정책적 이슈가 있는 나라를 방문하여 그곳 이슈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고 정책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요건이었다.


학교의 지원을 받고 미얀마로 가다


나는 주제를 민주주의로 잡았고 일단 미얀마에 있는 미국 민주주의 기관인 NDI(National Democratic Institute)에 방문연구원으로 지원하였다.


내가 연구 주제를 민주주의로 정한 이유는 옥스퍼드의 한 정치 수업이 계기가 되었었다.


공공정책에는 약 70여개국에서 1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치학 수업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케이스 스터디로 나왔다.


담당 교수는 이틀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수업은 정말 열광적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날 찾아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국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루었는지 물어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나라들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많은 동기들이 자국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유학 와서 공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미얀마 동기 중 한명에게 자신의 부모님이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군부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마음 한켠에서 미얀마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미얀마로 가서 민주주의 상황을 직접 관찰 연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사례가 미얀마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미얀마 행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


미얀마에서의 내 경험을 서술하기에 앞서 미얀마 민주주의 역사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미얀마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왕조가 존재하였고 근대에는 영국이 1824년부터 1885년까지 1차~3차 전쟁을 일으켜 미얀마를 식민지로 만들고 영국의 한 주로 편입하였다. 영국에 의해 미얀마의 도시 양곤에 근대식 건물이 세워지며 미얀마는 급속도로 번화해갔다.


하지만 정작 이런 변화 속에서 미얀마인들은 백인, 인도인, 중국인들 등 보다 더 떨어진 3등민으로서 차별을 받았으며 미얀마의 상업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미얀마의 중산층들이 계몽하기 시작하였고 그들로부터 버마 국민주의(Burmese Nationalism)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는 ‘우리 버마인 협회’(Dobama Asyone)이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단체로부터 아웅산 수치(Aung Ssan Suu Kyi)의 아버지이자 독립영웅인 아웅 산(Aung San)이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아웅 산은 1939년 ‘버마자유블록조직(BFBO)를 결성하였고 전쟁에서 유럽을 돕는 조건으로 미얀마의 독립 보장을 영국에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힌 아웅 산은 영국에 대항하여 전국에 독립 시위를 확산시켰고 영국은 지도부를 체포하는 등 강경히 대응하였다.


이에 아웅 산은 비밀리에 일본과 협력하여 영국을 미얀마에서 몰아낸다.


1943년 일본은 1년 안에 미얀마를 독립시킨다고 약속하였지만 일본군은 미얀마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강제노동, 식량 수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아웅 산은 다시 영국과 합세하여 일본을 몰아내었고 영국이 다시 미얀마를 식민지로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1948년 아웅 산이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인 끝에 버마 연방으로 독립에 성공하였다.


안타깝게도 아웅 산은 버마 연방을 설립한 직후 암살을 당하고 그의 부하였던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 집권하였다.


이러한 장기 집권은 미얀마에 민주화의 불씨를 일으키게 하였으며 1988년 아웅 산 수치를 중심으로 ‘888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 국민들과 함께 네윈 장군의 군사독재에 항거한다.


이때 전국적으로 시위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고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이 국민들 사이에 더 커져갔다.


이로 인해 군부는 직접선거를 허용하고 아웅 산 수치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를 결성하여 선거에서 압승하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선거는 무효화되고 아웅 산 수치는 가택에 연금된다.


아웅 산 수치가 가택에 연금된 후 미얀마 군부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압박을 받아왔으며 2003년 군부는 미얀마의 민주화 7단계 로드맵을 발표한다.


2015년 드디어 평화적으로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압승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웅산 수치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었다. 이는 군부가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사람은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군부가 얼마나 아웅 산 수치를 견제해왔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웅 산 수지는 국가고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실질적인 미얀마의 대통령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군부는 미얀마의 민주적 선거에 자신들이 국가를 여전히 지배할 수 있는 헌법 조항을 만들었는데 25%의 상하원 의회 의석은 군부가 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행정부에도 적용되어 내무부, 국방부, 국경부 등 3개 부처의 장관을 직접 임명하였고,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은 즉각 군부로 이양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부정한 헌법을 개헌하기 위해서는 의회 정원의 75%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해 놓아 군부의 협력 없이는 개헌이 불가능한 구조로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미얀마는 민주주의 선거를 치뤘지만 군부와 민주주의 정부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아슬아슬한 형태를 유지해왔다.


결국 이번 총선은 지난 2016년의 선거보다 민주주의 정부에 큰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권력의 추가 아웅 산 수치 쪽에 기울자 결국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쿠데타를 다시 일으켰다.


이는 내가 2018년도에 민주주의 연구를 위해 많은 정치인들을 만나 인터뷰 하면서 연구를 했을 때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나는 그래서 얼마 전 뉴스를 보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얀마에서 있으면서 민주주의 성향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 그리고 일반 시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래서 이번 쿠데타로 인해 조금이나마 그분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 칼럼을 쓰게 되었다.


미얀마의 민주주의에 대해 알리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미얀마 수도 네피도의 한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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