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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Jun 19. 2022

최고급 호텔 투숙에 필요한 자격조건

싱가포르 여행을 계획하며

 이번 여름휴가는 싱가포르로 정했습니다. 코로나 유행 이후 떠나는 감격적인 첫 해외여행이고, 부모님들과 함께 떠나는 의미 있는 가족여행입니다. 그동안 여행할 수 없었기에 준비된 경비도 두둑합니다. 또한 저는 좋은 호텔에 돈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침 싱가포르에는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이라 불리는 <래플즈>가 있습니다. 센토사 섬에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났던 최고급 리조트 <카펠라>도 있죠. 하지만 저는 이번 여행에 이 최고급 호텔들을 예약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자타공인 싱가포르 최고의 호텔 - Raffles hotel facade by raffles.com>


 고급 호텔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정의해보면 ‘잘 관리되고 있는 5성급 호텔'이라 할 수 있겠죠. 도시별 편차가 존재하지만 보통 3~40만 원대의 숙박비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70,000 USD의 1인당 GDP를 자랑하는 싱가포르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숙박비가 조금 더 비싸서, 5~60만 원 정도의 금액으로 <리츠칼튼>이나 <만다린 오리엔탈> 등을 이용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고급 호텔보다도 더 비싼 최고급 호텔이라니요? 위에서 말한 <래플스>는 제가 여행하려는 7월 숙박비가 150만 원, <카펠라>의 경우는100만 원이네요. 그야말로 ‘초고가’이자 ‘최고급’인 호텔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박 10만 원대 호텔과 20만 원대 호텔들의 차이는 상당합니다. 게다가 20만 원대 호텔에서 10만 원을 더 썼을 때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효용은 더욱 극적입니다. 방에는 욕조가 있고, 조식당에선 계란 요리를 즉석에서 만들어주고, 인피니티 풀이 생기며, 어메니티가 <LE LABO>같은 브랜드로 바뀝니다. ‘10만 원’이 주는 가치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거죠. 그런데 어느정도 고급이라고 불리는 5성급 호텔부터는 '10만 원'에서 오는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10만 원대에서 추가로 지출하는 10만 원과, 40만 원대에서의 10만 원의 가치는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2배, 3배의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최고급 호텔의 경우, 시설이나 서비스가 2배, 3배만큼 좋아지느냐?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부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다름’을 위해 훨씬 큰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거죠. 경제학원론 시간에 배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무나 최고급 호텔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 너무 위험한 발상이고, 오만한 발언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저는 감히 최고급 호텔에 투숙하기 위한 자격조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당연히 1박 150만 원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경제력입니다. 이런 재력을 보유하신 분들이라면 그냥 자연스럽게 투숙하시면 됩니다. 저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니 더 할 말이 없네요. 최고급 호텔에 숙박할 자격이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은 바로 '호기심 많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추가로 지불한 비용만큼 비례하여 많은 것을 얻겠다는 기대 대신, 비록 돈을 많이 지불했지만 ‘최고급’만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작은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이미 많은 호텔들을 경험했고, 호텔 숙박에 대한 가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여행객들이겠죠. 그런데 이번 가족여행에서 저와 아내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이런 호기심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에, <힐튼>이나 <쉐라톤>이라고만 해도 최고급 호텔이라고 알고 계신 분들이기에, 전 과감히 <래플스>를 포기했습니다.


<나의 선택 - The Capitol Kempinski Hotel Singapore by kempinski.com>


 부모님들을 <래플스>에 모시고 가면 당연히 좋아하시겠지만, 1박에 150만 원이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등짝을 맞고 여행의 분위기는 냉랭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가족여행에는 쾌적하고 교통이 편리한, 그리고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이면 충분하겠죠. 레스토랑도 똑같습니다. <Odette>, <Les Amis>가 버티고 있는 미식의 성지인 싱가포르이지만, 가족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가족들도 ‘멋진 분위기의 맛있는 양식당’을 경험하고 싶겠지만, 긴 시간이 필요하고 음식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동반되어야 하는 파인 다이닝을 끼워 넣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Odette>의 셰프 Julien Royer가 캐주얼한 분위기로 오픈한 <Claudine>정도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옹기종기 도란도란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겠죠. 만약 이런 경험들이 쌓여, 가족들이 더 섬세하고 복잡한 요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럼 그때 <Odette>를 모시고 가면 그만입니다.


 물론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이 빕구르망을 받은 레스토랑보다 맛있을 확률이 높겠죠. 개별 호텔들마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쉐라톤>이나 <밀레니엄 힐튼>보다는 <세인트 레지스>나 <월도프 아스토리아>가 더 화려할 겁니다. <아만>이나 <원앤온리>의 고급스러움은 단연 독보적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수준의 차이를 더 선명히 느끼기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최고급 호텔만을 열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순서와 단계가 있는 것처럼, 여행의 구성원과 목적에 맞는 숙소를 하나하나 이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작은 차이들을 느낄 수 있을만한 경력이 쌓이지 않을까요? 고급진 숙소에서 호강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비싸지 않은 숙소들은 꼭 최고급이 아니더라도 세계 곳곳에 정말 많이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최고급을 경험하면, 이후 대부분의 숙소에서 만족감을 얻기 어려울 수도 있을 테고요.


<호기심 많은 아내와의 여행 - Amandari>




 다소 도발적이었지만 ‘최고급 호텔에 투숙할  있는 자격조건 존재하고, 조금 허무하지만 그것은 호텔 투숙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이야기할  있겠습니다. 호텔에 끌고  명품 캐리어나, 보증금 지불을 위해 내미는 신용카드의 등급,  자산총액이나 소득 수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롭고 희소한 경험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자격을 충족합니다. 이번에 여행할 숙소가 1박에 100 원이라고 주변에 이야기하면, “너네  갑부였어?” 혹은 “미쳤냐?  으로 OO 사겠다 같은 반응이 돌아올 겁니다. 그럼 조심스럽게  호텔이 궁금한 이유,  호텔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설명해 줍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그저 웃으며, ‘ 역시 아무나 최고급 호텔에 숙박할  있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호텔 투숙은 누군가에겐 좋은 취미일  있습니다. 비록 때론 매우 값비싸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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