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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Jun 23. 2022

휴양지 리조트 수영장에서 우아한 독서를

평범한 직장인의 휴양지 여행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팀 내 하계휴가 계획을 취합해 조율하자는 팀장님의 말씀에 다급히 꾸역꾸역 5박 6일의 여행 계획을 만들어 제출합니다. 격무로 지친 심신을 달래보고자 이번 여행은 휴양지에서의 온전한 휴식을 컨셉으로 잡았습니다. 도심의 번잡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이번 여행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수영장 썬베드에 기대 우아하게 책을 읽으며 한가히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늘 여유로이 수영장을 즐기는 서양 여행객들이 부러웠기에 비장한 각오로 예쁜 수영복과 책 한 권을 여행 가방에 꾹꾹 담아 봅니다.


 우선 필요한 건 한 권의 책입니다. 혹시라도 두 권을 챙기는 만용을 부리지는 마세요. 지금 한달살기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호흡이 긴 책들을 고르면 안됩니다. 밑줄을 그으면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전공도서도 절대 금물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날 직격 하는 이 수영장 한켠에서, 긴 분량을 쉬이 읽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책들은 읽어봐야 어차피 한국에 가서 다시 읽어야 합니다. 혹은 영원히 읽지 않겠죠. 그러므로 시집이나 수필이 좋을 것 같습니다. 꾹 참고 집중하면 한 챕터는 읽을 수 있거든요. 그런 맥락이라면, 만화책이나 잡지가 좋겠지만 SNS에 올릴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이건 멋이 안 납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같은 책들도 사양합니다. 여행에 너무 의미를 두는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쿨해 보이지 않거든요.


<수영장에서 그림도 그려보기, 그리고 알랭 드 보통 - Amankila>


 두 번째로 필요한 건 내 처지를 바로 아는 일입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 누워, 수영도 별반 하지 않고, 대화도 없이 책을 보고 낮잠만 자는 저 여행객들에 비춰 나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저들은 이 리조트에 지난주에 도착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 지겨워서 저러는 것 일수도 있어요. 내가 저들처럼 휴양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내 타고난 성품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과 직장의 취업규칙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풀장 직원이 유독 저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도 그들이 서로 알게 된지 이미 2주일이 지나서 일거예요. 나는 어제 체크인을 했고, 내일 체크아웃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들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참을성 있는 동행도 필요합니다. 미취학 아동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애초에 모든 우아함의 달성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혼자 노는 것이 가능한 자녀들이라면 조금의 여유가 생기겠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경우는 친구나 연인과의 여행이겠죠. 그런데 갑자기 이 동행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나 너무 더워, 들어갈래” 라던지 “우리 식당 예약이 몇 시였지?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아?” 라며 내 여유로운 독서를 방해합니다. 함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동행이나, 나 없이도 알아서 혼자 잘 노는 동행이 필요하겠죠. 독서하고 있는 내 사진을 알아서 자연스럽게 촬영해 줄 수 있는 동행이라면 금상첨화겠고요.

 

<망중한 - Amankila>


 애초에 긴 휴가가 불가한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리조트에서의 긴 휴식은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온전히 휴양만을 위한 여행이라면 몰라도, 일정 중간중간 투어도 해야 하고 호텔도 바꿔보고 싶은 여행객들에겐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목적을 분명히 잡고, 그에 맞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 와본 여행지이고, 매력적인 관광 포인트가 존재하는데 구태여 긴 수영장 이용과 독서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요?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짧게나마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히며 풀 바의 칵테일 한잔과 함께 석양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여유로운 즐김이란 건 꼭 손에 책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3시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한 것도 아니라, 오직 마음가짐으로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내게 가능한 여유의 정도와, 내가 원하는 여유의 수준을 균형있게 타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념무상, 해탈의 경지 - Portrait of Nick Wilder by David Hockey>


 방송국에서 예능을 만들 던 PD 시절에는 한 시즌이 끝나면 2주 정도의 넉넉한 휴가가 부여됐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영장에서 낮잠도 자고, 운동하고, 한가한 산책도 자주 했습니다.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일반 사무직군을 옮긴 후에는 4박 5일, 5박 6일의 패턴밖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오고 가는 시간을 제한 뒤 짧은 일정 중에 여유를 찾아보려 하니, 그제야 쉽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다만 휴식을 위해 귀중한 연차를 사용해서 떠난 여행 중, 하릴없이 내 휴가의 짧음과 그로 인한 여유의 부재를 한탄할 필요는 없겠죠. 그저 내 방식대로 여유를 즐기면 됩니다. 장기 투숙객들의 여유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짧지만 임팩트 있게 여유를 만들 방법을 찾아야겠죠. 시간은 상대적이고, 내 1시간이 다른 사람들의 3시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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