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방송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였습니다. 다른 야외촬영물에 비해 해외 푸드 예능의 촬영 동선을 짜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당 도시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들을 골라서 동선대로 쭉 연결하면 끝입니다. 이동의 수월성과 촬영의 용이성만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대본 속에서 출연자나 제작진의 기호는 거세되고, 서사의 엄밀한 연속성은 다소간 무시됩니다. 편집으로 극복이 가능하거든요. 간혹 출연자들이 현장에서 쉴틈없는 스케쥴과 겹치는(그래서 물리는) 음식들에 불만을 토로하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일인걸요. 우리는 모두 프로니까요.
그러나 이게 실제 여행이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겁니다. 여행지에서의 식사를 계획하는 일에 정답은 없겠지만, 마냥 유명한 곳만을 순회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겁니다. 여행의 테마, 그 나라의 식문화, 동행들의 기호 같은 것들을 잘 버무려야겠죠?
먼저 쉬운 경우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바로 '먹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여행입니다. 이 경우엔 그저 가고싶은 식당들을 정해 방문하면 됩니다. 동선이 꼬일 수도 있고, 이동에는 불편함이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먹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주의점은 있습니다. 바로 구성의 문제입니다. 일정은 유한하고 식당은 다양합니다. 겹치는 장르를 최대한 배제하고 순서를 곱게 정해야 합니다. 제 지난 뉴욕 여행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몇년전쯤에 그야말로 ‘먹는 것’만을 위해 짧은 뉴욕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각종 랭킹에서 1위를 하며 인기를 구가하던 <Chef’s Table at Brooklyn Fare> 예약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여행을 계획했죠. 반등에 성공하고 있던 <Per Se>도 가고 싶었고, 가보지 못했던 <Eleven Madison Park>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짧은 일정을 헤비한 파인다이닝들로만 구성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위 업장들 대신 한결 가벼운 프렌치 <Le Coucou>와 라틴아메리카의 터치가 가미된 <Cosme>, 한식 퓨전 <Atomix>를 넣었습니다. <Five Guys>와 <Ess-a-Bagle>, 그리고 일행을 위한 <Peter Luger>도 들렀지요. 동선이 중구난방이었지만, 괜찮습니다 먹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행복한 포만감과 함께 짧은 일정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들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관광이나 휴양의 경우, 식당을 고르는 방식은 조금 다를 겁니다. 내가 익숙하지 않고, 경험해보지 않은 식문화의 도시를 방문하는 일은 그나마 조금 수월합니다. 먼저 그 도시에서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찾아내고,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을 고르고, 각각 유명한 식당들을 추려 구글지도에 표시합니다. 내 숙소, 내 여행 동선과 인접한 식당이 있으면 그곳을 예약하고 방문하면 됩니다. 그런데 뜬금없는 위치에 있다거나, 내 동선과 너무 떨어져 있는 식당이 있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떡볶이를 처음 먹는 외국인이 한국사람만큼 <조폭떡볶이>와 <죠스떡볶이>의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경우 그에게는 <조폭떡볶이>에 대한 감상보다는 ‘떡볶이’에 대한 감상이 우선하겠죠. 우리가 해외여행에서 새로운 음식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오쁘라야 강변 페닌슐라 호텔에 숙박하고 있는 어떤 가족이 팟타이와 뿌빳퐁커리를 먹고 싶어서 스쿰빗 <수다식당>까지 가는 걸 생각해봅니다. 숙소 근처에도 팟타이 맛있는 가게가 있지 않을까요? 조선팰리스에 숙박한 외국인이 <진미평양냉면>이나 <피양옥> 놔두고 굳이 강을 건너 <우래옥>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해외 식당 후기들에는 '경로 의존성'이 있습니다. 초창기에 그 여행지를 다녀온 소수가 리뷰를 작성한 식당들이 계속해서 전승-확대 재생산-되어 큰 유명세를 획득하는거죠. 그런 측면에서, 한국 웹사이트에 자주 노출되지 않은 식당들에도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고, 또 한국에서도 많이 판매하는 음식을 맛보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일본여행에서 먹는 스시가 대표적인 경우죠. 이미 한국의 스시 수준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카네사카>, <기요다>, <칸다> 와 같은 곳에서 수련하고 돌아오신 셰프들도 많고, 유명호텔 일식당들을 중심으로 내재적인 발전도 이루어졌죠. 이른바 ‘미들급’ 스시야들의 수준도 상향평준화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그렇게 맛있었던 신오쿠보 숙소 앞 이름모를 회전초밥집에 다시 방문한다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 할 겁니다. ‘일본 스시는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철저히 우리 입맛이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조폭떡볶이>와 <죠스떡볶이>가 구분되는 시점에 도달한거죠. 물론 전반적인 수준은 본고장이 당연히 높겠지만, 우리는 늘 그것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하고 여행을 떠나니까요.
이런 경우라면 식당을 고르는 일에 어느정도는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동선과 조금 떨어져 있다곤 하더라도, 현지에서만 느낄 수 있을 ‘작은 차이’를 찾는 것에 도전하는거죠. 현지의 공신력 있는 평가들을 참고하고, 숙소 컨시어지에 미리 연락해 정보를 얻습니다. 그렇게 정한 식당들을 일정이 조금 여유로운 날에 배치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야, 다른 즐거움을 찾으면 됩니다. ‘분짜’는 사라지지 않고, ‘딤섬’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음번을 기약하며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어쩌면 낭만적인 여행자의 자질이겠죠.
나름 유형화를 해봤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봐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맛’ 이외의 경험을 제공하는 식당들입니다. 안다만해의 석양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푸켓의 <Baan Rim Pa>, 식당 바닥 밑 수로에서 직접 낚은 오징어를 회로 먹는 후쿠오카 <자우오>, ‘Food ethic’, ‘Sustainability’ 와 같은 가치를 배울 수 있는 뉴욕 근교 <Blue Hill Farm>과 같은 레스토랑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또한 역사와 스토리를 갖고 있는 곳들, 이를테면 싱가폴 슬링의 탄생지 래플스 호텔의 <Long Bar>,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한 하노이 <흐엉리엔> 같은 곳들도 마찬가지겠죠. 이런 곳들은 단순히 식당으로만 기능하지 않을 겁니다. 일종의 액티비티가 되어버린 거죠. ‘맛’이나 ‘가성비’ 같은 고전적 기준보다는 경험과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온당하지 않을까요?
제목에 '해외 푸드 예능 PD'를 운운했지만 실상 무관한 내용만을 채워넣은 점을 글의 끝단에서야 발견했습니다. 민망함에 다급히 결론을 내보고자 합니다. 여행지에서의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먹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싱겁나요? 그래도 한번 함께 그려봅시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온종일 투어 프로그램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방에 둘러앉아 먹는 룸서비스와, 마음맞는 친구들과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린 날 도망치듯 들어간 대형 쇼핑몰에서 거하게 한상 차린 푸드코트를요. 저는 이렇게 오늘도 다음 여행지의 식사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