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15:22)
복음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여인은 부르짖는다.
마태복음 20장,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어느 시각장애인의 사례에서는 예수님께서 금방 반응도 하시고 순식간에 고쳐도 주신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이렇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복음 20:32-34)
얼마나 좋은가? 친절하고 능력 있고..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대하는 이 예수님은 다른 사례 속 그 예수님과 과연 같은 사람인지 참으로 의심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태복음 15:23)
예수님은 일절 반응하지 않으셨고 함께 있던 제자들은 심지어 쫓아버리자고 하기까지.. 성경이 오직 도덕적 모범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은 완벽한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엾은 여인에게 어쩌면 이렇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마태복음 15:24)
결국 입을 여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역은 이스라엘인 전용'이라시면서 '이방 여인의 사정은 전혀 알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설사 그 말이 맞다고 치자. 계속 가만히 계셨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굳이 이렇게 얘기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이런 명백한 차별적 발언이 오늘날 성경에 기록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혹 이런 게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태도인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5:25-26)
정말 너무한다. 여인이 이토록 비굴한 모습으로 간청을 하는데 아예 대놓고 '개'라니.. 제자들도 아니고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이런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그래 좋다! '이 개xx! 또 저 개xx!'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태복음 15:27)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짜증을 내고 포기하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모든 걸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 또한 미리 다 아시고, 또 결국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을 미리 다 아시어서, 모진 형편 가운데 결국 여인의 믿음이 더욱 온전히 드러나게끔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신 것은 아닌지..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8)
'만약 내가 이 여인이었다면?' 걱정하지 말자. 오늘 내 생각대로라면 아마도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상대로 이와 같은 일을 결코 벌이지 않으실 것이다. 여차하면 발끈하고 내 맘에 들 때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상대해서는 절대로 이런 일을 벌이지 않으실 거란 얘기다.
성경 가운데 오고 가는 말만 주목해 살피면 종종 시험에 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보고 핵심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실망스럽고 너무나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 가운데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드러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자. 혹 내게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다름 아닌 내 믿음도 가나안 여인의 믿음처럼 이렇게 훌륭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님께서 날 믿고(!?) 마음껏 내지르시게..
영혼 없는 기계적인 신앙고백 무한반복 훈련으로 될 일은 절대 아니고..
‘먼저 유대인의 기준, 율법으로 여인을 대하시는 가운데 율법의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다. 그 사이 도리어 선명하게 드러난 이방 여인의 믿음에 기초해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심지어 원격 비대면으로 여인의 딸을 치료해 주셨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감수하는 엄마의 마음, 뒤이어 등장하는 청각장애인 친구의 마음으로 살기에 대하여 또..’ (2024년 9월 8일 중앙루터교회 주일예배 최주훈 목사님 설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