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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Jul 23. 2024

애틀랜타에서 파리까지

여덟 번의 하계 올림픽 중계

유학 직후였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코로나 바이러스 시절이었던 도쿄 올림픽만 빼놓고 입사 이래 하계 올림픽 현지 출장은 거른 적이 없다. 현지에 가든 못 가든 중계는 다 했고.. 꼽아 보면 여덟 번씩이나 되니까 ‘일찍부터 으레 출장 가는 사람 반열에 올라 죽 대접받고 살았나 보다’ 싶기도 하지만, 매번 출장길이 그렇게 생각처럼 순탄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애초에 출장자가 아니었다가 대회 직전 20대 젊은 자원 전격 발탁을 통해 졸지에 가게 된 것이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장은 몇 년 동안 중계 배당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실상 중계를 포기하고 살던 중에 놀라운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된 것이었다. 역사적인 핸드볼 중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이어졌고..


여자 핸드볼 3/4위전 ‘언니들의 졸업식’으로 기억에 남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장이 개중 소동이 없었던 편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회사에서 절대로 현장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파업 참가자였지만, 방송사간 종목별 배분에서 우리 회사가 펜싱을 뽑은 덕에 그렇게 구하기 힘든 펜싱 중계 자원으로 어려운 출장 기회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 펜싱 최고의 순간을 매일 현장에서 중계할 수 있었고..


2016년 리우에서는 ‘할 수 있다’ 박상영 선수의 펜싱 금메달 소식을 현장에서 전하는 쾌거가 있었지만, 대회 후반에 중계하기로 했던 핸드볼이 일찍 탈락하는 바람에 내 효용이 본의 아니게 절하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기도 했다. 1년 연기돼 2021년에 치른 2020년 도쿄 올림픽 때는 팬데믹으로 출장인원이 최소화되는 바람에 결국 현장에 가지 못했다.


중계권료가 너무도 크게 오르면서 대형 스포츠 행사는 더 이상 방송국에 황금알을 낳아 주지 않는다. 되도록 적자를 줄이는 게 관건일 따름이다. 이 와중 역병이 돌았던 시절은 출장인원을 최소화해도 각 방송사가 적절히 대회를 치를 수 있다는 굳은 생각을 갖게 해 버리고 말았고..


2024 파리 올림픽. 우리 선수단의 규모가 유난히 작고 전체적으로 메달 획득 전망이 그리 밝지 않지만, 내가 20년 넘게 중계해 온 펜싱이 여전히 유력 종목인 덕택에 최소화된 현지 출장자 명단에 또 간신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내 정년은 아직도 5년이 남아 있다. 정년 전에 이번 파리 올림픽 다음 올림픽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2028 LA 올림픽 중계권은 우리 회사가 갖지 못하고 있다. 파리 올림픽이 내가, 또 우리 회사가 마지막으로 중계하는 올림픽일 공산이 크다.


All’s well that ends well.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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