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가정예배를 준비하며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편)
시편 100편은 제가 고른 본문이 아닙니다. 모교회에서 그냥 읽기만 해도 (추석 차례 대신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만든 가정예배 예시에 따른 것입니다. 전통 명절 추석의 의미보다는 미국 기독교의 전통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우선해 고른 본문인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 예배는 따로 드릴 텐데 말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이 많으니 굳이 시비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석의 의미를 임의로 폄하하고 나름의 목소리를 마음껏 높여 마땅한 형편인지는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건 자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반응할지요?
최근, 이를테면 기도제목이 많았습니다. 등한시했던 기도의 모양을 갖출 때가 제법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기도의 분량을 만드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내 뜻으로만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 꼼짝 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매년 대학 입학 정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기도한 사람 중에 대학 못 가는 사람들이 매년 나오고 또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는 기도가 적잖이 있는 것 아닙니까?
반백년 넘게 살다 보니 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아 다행인 경우가 매우 많은 걸 보게 됩니다. 부족한 나의 뜻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섭리가 따로 있는 것이지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태복음 6:7)
다름 아닌 예수님 말씀에 근거해 말을 줄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이를테면 듣는 기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거나 함부로 주문하기보다 잠잠히 하나님의 오마카세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 나를 향하신, 온전히 선하신 그분의 숭고한 뜻. 그 믿음으로 가득한 시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편 100:3)
내 모든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정한 어떤 것보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굳게 형성하고 있는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