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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Feb 14. 2021

누구든지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

* 2018년 1월 9일 (파업 128일째)


평창 동계올림픽이 정확히 한 달 남았다. 결국 평창에 가지 못하게 될 것도 당연히 불사하고 넉 달 넘게 흔들림 없이 파업대오를 지켜 왔다.


다행히 파업은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젠 일말이라도 올림픽 중계방송에 투입될 가능성을 보고 개인적으로라도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지..


파업을 승리로 마치고 정상화된 회사에 일찍 복귀한 경쟁사 아나운서들은 홍보영상을 실컷 퍼올리며 잔뜩 신이 난 모양.


제대로 준비하기에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동안도 큰 대회 출장자 명단을 그렇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지한 적이 별로 없었다는.. 이런저런 이유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고..


여하튼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준비해도 결국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나쁜 사장을 제때 쫓아내지 못해 결국은 중계를 못할 때 못하더라도..


‘그래. 내 고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구나!’


그런데 만약 중계를 하게 되면 내가 어떤 종목을 중계해야 돼? 혹시 난 안 해도 되나?


알았어. 어찌 되든 “다시 KBS, 국민의 방송으로!”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4)


142일 파업을 잘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종목별로 지방에 있는 훈련장에도 다녀오고 정신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2주 남짓.


내가 맡은 종목은 컬링. 2014년 소치 대회 때는 세부종목 남/녀 두 개 중 여자 한 종목 출전에 3사 순차 중계를 해서 나는 달랑 세 번만 중계한 변두리 군소 종목. 그런데 이번에는 남/녀/혼성 전종목 출전에 순차중계도 아니었고 종목마다 예선 풀리그라 한국 경기를 일일이 다 중계한다면, 매번 두어 시간씩이나 걸리는, 이 지독히 긴 경기를 최소 스물다섯 경기나 중계해야만 했다.


해설자는 전임자의 추천으로 내정된 사람이 있었지만, 충분히 검증할 방법과 시간이 없었다. ‘방송시간이 참 긴데 부디 훌륭한 사람이기를..’ 결국 컬링 아재 브라더스, 아재 콤비의 일원이 된 서울시청 이재호 감독.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데, 가뜩이나 하대를 금방 잘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 자꾸 말을 놓으란다. 대략 일곱 살 아래. 둘 다 40이 넘었으니 아재는 아재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젊은 총각인 줄 아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데, 억울하다면 자기 노안 때문에 같이 아재가 돼 버린 내가 억울하건만, 나 때문에 같이 아재가 돼 버렸다고 늘 투덜투덜.


하지만 경험 많은 승부사답게 치밀하고 철저했다. 그리고 구변이 좋았다. 시청자들은 개념조차 잡지 못한 종목, 뭐가 공격이고 뭐가 수비인지도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는 경기를 그토록 긴 시간 중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다. 김영민 PD와 내가 애써 함께 찾은 ‘컬링 노트’ 사용법을 2~3일 안에 완전히 숙지해서 입체적인 설명을 더한 것은 실로 압권이었다. 컬링 노트가 가끔 오답노트라 불릴 때가 있기도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선수들의 작전 수행이 결과적으로 작전을 감당하지 못한 경우의 일이었다.


이번 올림픽에 처음으로 채택된 혼성 (2인제) 경기는 대회 개막 하루 전에 시작돼 우리나라 전체 선수단에 첫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의성 훈련원에서 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중계석에 올려놓고 중계를 시작했다. 리우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 박상영 선수를 찍었던 카메라라고 하니 선수들이 더 적극적으로 촬영에 응했던, 그래서 찍게 된 바로 그 사진을..


이기정, 장혜지 선수로 구성된 우리나라 혼성팀은 비록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컬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뒤이어 시작된 남녀 경기에서 남자팀은 거듭 되는 패배 속에 매우 실망스럽게 출발했지만, 여자팀은 첫 경기에서 지난 대회 금메달리스트, 세계랭킹 1위 캐나다를 이긴 이래, 같은 날 일본과의 경기에서만 아쉬운 패배를 기록했을 뿐, 그야말로 쾌조의 흐름을 이어갔다.




*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편 118:22)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알지도 못했던 종목이 평창 동계올림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어떤 종목이든 각광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 어떤 사람도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취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준결승전이었는데 결승전 승리 이상의 감동과 감격이 있었다. 올림픽이었던 데다가 한일전이었고 설욕전이었으며 정말 조마조마했던 박빙의 승부였기 때문이리라. 이름 없이 사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실한 삶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끊임없이 놀라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입증해 준 선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그런데 이렇듯 엄청난 일이 준결승전에서 일어났거늘 결승전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군가 소설을 계속 쓰는 거라면, 이후 어떻게 더 크고 멋진 내용을 억지스럽지 않게 결말로 써낼 수 있을지..


결승 하루 전 자료를 정리하며 마음을 비웠다. 결승 상대 스웨덴은 비록 예선 맞대결에서 우리에게 패한 바 있지만, 객관적으로 이번 대회 최강팀이 틀림없었다. 팀당 네 명이 나서는 경기에서 세 명의 성공률이 포지션별 1위였다. 야구에 비유컨대 타율이 높으면 안타를 많이 칠 거고, 안타를 많이 치면 점수를 많이 낼 것이며, 점수를 많이 내면 이기게 된다는..


결승전은 10 엔드를 채우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고.. 하지만 대한민국 컬링은 온 국민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이를 갖고 자꾸 시비하는 이재호 위원이 묻는다. 4년 뒤 베이징 대회 때는 내가 정년을 맞을 나이가 아니냐며.. “택도 없다!”




*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혹 컬링 경기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 투입되기 위해, 심지어는 100 명도 넘는 출전선수명단을 뽑아 놓고 일일이 이력을 정리한 뒤 대기했다가 결국 방송하지 못하곤 했던 동료 아나운서들. 나름 사상 최고의 팀워크를 자부했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고 싶다.


김현태(아이스하키, 알파인 스키, 스키점프), 이재후(쇼트트랙, 개폐회식), 이영호(스노보드, 프리스타일 스키), 이광용(스피드스케이팅), 김승휘(피겨스케이팅), 강승화(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 크로스컨트리 스키, 바이애슬론), 한상헌, 이지연, 오승원, 김솔희, 오언종, 김지원, 박소현(평창과 서울 스튜디오).


그리고 지난 세기부터 부족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북돋우며 또 일깨워 주신 많은 선배님들께 참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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