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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Sep 14. 2020

내가 축구를 이해하는 방법 - 정체성

Football is Your Identity

‘Identity'나 'Atmosphere' 같은 단어가 그렇게 생경한 단어는 아니다. 오히려 '생경하다'는 말이 더 생경할지도 모르겠다. 영어를 좀 배운 학생들은 '정체성', 그리고 '분위기'라고 또박또박 대답을 잘할 것이다. 맞다. 정확하다. 그러나 '이것'과 'this'가 매우 비슷한 뜻을 가졌지만 엄밀히 말해 똑같은 단어가 아니듯, 'identity', 'atmosphere'는 '정체성', '분위기'로 쉽게 해석되지만, 다른 문화적 토양과 여건 속에서 그 느낌과 중요성이 적잖이 다른 게 사실이다.
 
1. Identity
 
영국에서 유학을 하며 축구 중계와 관련한 공부를 할 때 가장 집중했던 문제가 'identity'다. 결국 학위논문 제목도 'The Construction of National IDENTITY in the Media Coverage of Football Matches (축구 중계에 나타난 국가 '정체성' 문제)'! 우리나라에는 스포츠와 정체성을 다룬 책이나 연구가 아직 많지 않지만, 영국에는 참고할만한 자료가 정말 그득그득했고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은 스포츠에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만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인위적인 조작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정체성에 제대로 기반하며 정체성을 제대로 반영하는 스포츠 유통/소비구조를 적어도 지향 혹은 견지하느냐 하는 점에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꽤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정체성 문제에 있어 우리나라 프로축구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고 또 크다. 야구의 경우 부산 사람이라면 거의 당연히 롯데 자이언츠 팬이 된다. 다른 가능성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부산 사람이라고 해서 거의 당연히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의 팬이 된다? 특정 지역에서 축구가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축구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꽤 있을 것 같은 수원의 경우라면?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수원 삼성이 라이벌 FC서울과 이른바 슈퍼매치를 벌인다고 치자. 4만 안팎의,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사람! 대부분 수원 사람 혹은 수원 출신들일까? 적잖은 ‘서울’(!) 사람들이 수원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 사당동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수원의 홈 경기장, 빅버드를 향해 때마다 숱하게 몰려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물론 이 점은 FC서울의 근거지 이전으로 인한 교란의 탓이 매우 크다. FC서울의 근거지 이전은 지역 정체성에 근거해 오랫동안 성원을 보내온 과거 안양 팬들의 사랑을 일거에 저버리는 가슴 아픈 일이었고, 정체성 문제를 안중에 전혀 두지 않은, 편의적이고도 임의적인 행보는, '서울로의 당당한 복귀'라는 구단의 주장에도 불구, 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의 맹비난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수도 서울에 팀이 생기긴 생겼으나, 이 나라 전체 인구의 1/4이 넘는 많은 사람, 천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 팀을 자기 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너무나도 꺼림칙한 상황을 맞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이 팀은 그 나름 안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정체성 차원에서 이 문제는 그 자체로 크나큰 재앙이었고, 구단으로서는 이 업보를 영원히 지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서울에 사는 서울 사람이 적잖이 포항으로, 울산으로, 광양으로, 제주로, 서울 아닌 팀을 응원하러 다니는 걸 보면, 프로축구가 기반하고 있다는 지역 정체성은 매우 형식적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역 이름은 허울일 뿐, 열성 축구팬들은 지역 정체성 아닌 다른 요인을 근거로 삼아 각기 좋아할 팀을 어렵게 고른다는 것. 이게 문제다. 누구나 일정한 지역에 근거해 사는데, 지역 정체성에 기반한 쉬운 방법을 놓아두고, 다른 매력을 억지로 만들어 제공해야만 하니..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 프로축구도 계속 발전하고 있고, 한국 축구 또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느냐는 주장. 상당히 타당하기도 하지만, 정체성에 잘 기반하면 더욱 급속한 발전을 제대로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아쉬움. '아! 한국 축구!' 얘기 잘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국가대표 축구'를 얘기하시는 게 아닐지..
 
그렇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은 중계방송 시청률도 매우 높고 관중 숫자도 매우 많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국가대표 경기가 이처럼 큰 성원을 받는 것은 사실 기술적인 완성도나 매력적인 선수의 등장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이길 가능성이 높아서? 우리는 브라질이 아니다. 정답은 '온 국민이 이 팀의 정체성을 온전히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져도 이 경기를 끝까지 보게 되고, 심지어 다음 경기도 또 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답은 정체성에 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막 생기고 또 마구 공유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진 어느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이었는데 양교 학생들이 응원을 나와 있었다. 0:1로 뒤지고 있는 팀이 매서운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응원 나온 그 학교 학생들이 마구 야유를 보내더라는 것. 그 학교 선생님 중 한 사람이 아는 후배여서 물어봤더니, 동점 되면 연장 가고 연장 가면 이기든 지든 집에 더 늦게 가게 되니까 그러는 거란다.
 
‘축구부 운영하면 학생들의 애교심 함양에 도움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축구팀을 한 팀이라도 더 만들려면 곳곳에서 이런 얘기를 반복해야 하겠지만, 이 얘기는 생각만큼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요즘 들어 '학생선수'라는 당연한 개념이 돌연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축구부에 속해 있는 학생선수와 그 밖의 그냥 학생들이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공유하는 정체성을 상상하기란 여전히 참 어렵다. 선수들은 선수 경력을, 다른 학생들은 단지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학교라는 존재와 공간을 각기 필요로 할 뿐,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거의 어떤 형태로도, 생활과 문화를 제대로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이 불편한 진실.
 
정체성이라는 열쇠로 문을 열고 현실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 같이 근본적인 문제까지 직면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근본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걸 겉치레로 형식적으로만 대처해 온 우리 사회의 문제다. (북한의 소행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포츠와 같은 사소한 일에 누가 그동안 그 귀한 머리를 쓰셨겠는가? 오랜 세월 국가가, 또 정부가, 국가 또는 정권의 이해에 따라, 그다지 깊은 생각 없이 스포츠를 마냥 이용하기만 해 왔다는 사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건강한 스포츠 문화 형성에 여러 면에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왜곡된 구조 속에서 스포츠 문화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일반 대중. 자기 팀은 딱히 없거나, 있다고 해도 영 어색하기만 한데, 외국 축구 팬들이 워낙 멋있어 보여서일까, 왠지 축구 팬 노릇은 하고 싶고.. 난데없이 축구지식 내공 쌓기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찬받으며 해 본 일이 워낙 공부 같은 것밖에 없다 보니.. 뭐든 내공을 쌓는 것을 마냥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다지 건강한 느낌이 아니라는 것. 서로 북돋우며 축구문화를 키워 나가기보다 결국 내공 싸움이나 하기 십상이어서 문제다. 사과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 먹어 보지 않은 사과의 맛을 설명하며 '난 사과를 참 좋아해요'라고 열심히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 궁극적으로 본인 포함,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고..
 
덧없는 내공 싸움이나 벌이지 말고, '여하튼 스포츠 참 좋아한다'는 애매한 소리나 하지도 말며, 또 실속 없이 아무 팀이나 대충 큰 팀을 정신없이 쫓아다니지도 말고, 혹 좀 지나치게 소박해지는 느낌이 들더라도, 내 팀에서 뛰든가, 적어도 진정한 내 팀을 꼭 가져야만 한다.
 
아내에게 써놓은 글을 좀 읽어 봐 달라고 했더니 '아직도 이 얘기를 계속하고 있느냐? 이거 옛날 그 얘기 아니냐?'고 한다. 하긴 그렇다. 내 표현과 주장이 미흡해 그 사이 큰 파장이 없었던 것도 문제. 하지만 십수 년 오랜 세월 그리 변한 게 없는 세상도 참..
 
그래도 초심은 여전히 참 아름답다. 영국 유학 직후, 2002 한일 월드컵 직전, 본바닥에서 채워 온 많은 것을 신나게 퍼나르던 시절,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 기고했고 나의 유일한 저서에도 수록한 바 있는 정체성 이야기 일부를 여기 또 인용하며 정체성 이야기는 여기서 또 일단 마감!
 
"우리나라 실정에 서포터든 서포터가 아니든 축구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지나가다가 괜히 들른 사람이든, 국내 스포츠를 살려야 한다는 일종의 구국 일념을 가진 사람이든.. 하지만 아쉽게도 한두 번 축구장을 찾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축구장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죽하면 한 때 활발했던 축구장 가기 운동의 목표가 1인당 1년에 두 번 축구장 가기였을까? 여하튼 ‘축구를 사랑하자’는 구호는 난무하는데..
 
직업이 축구 중계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별 관계없는 팀의 경기도 많이 가서 보게 된다. 하긴 우리나라의 숱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팀이 얼마나 될까마는.. 어쨌든 경기장에 가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매 경기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경기를 충분히 즐기려고 애를 쓰지만, 솔직히 말해서 재미있고 볼만한 경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출신 학교의 경기라든지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는 팀의 경기라면 경기 내용이 변변치 않더라도 거의 반드시 경기에 몰입을 하게 된다.
 
특정 팀을 응원하지 않으면서 축구에 대한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특별히 응원하는 팀 없이 축구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다. 역시 어디에선가 주입된 축구 사랑에 대한 강박 관념. 또 거기에서 비롯된 자기기만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렇다면, ‘축구는 다 좋다. 이 세상 모든 축구팀을 다 좋아한다’는 사람의 경우는? 이 경우도 거의 비슷한 증세로 볼 수 있다. 말이 그렇지 이 세상에 어떤 팀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떻게 경기를 벌이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숱한 사람들이 어떻게 모든 팀을 다 좋아한단 말인가?
 
오히려 한 팀을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 진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영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영화화되기도 한 자전적 소설 ‘Fever Pitch’의 주인공 닉 혼비(Nick Hornby)는 축구광이기 이전에 골수 아스날 팬이다. 그의 솔직 담백한 아스날 사랑 얘기가 ‘Fever Pitch’라는 소설이 되었고 그 소설이 축구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지, 축구에 대해 거창한 담론을 쓴 사람이 알고 보니 아스날 팬이었던 게 아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아스날 팬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추상적인 축구 사랑은 의미가 없다. 당장 내가 좋아하는, 또 나를 대표하는 나의 팀이 있어야 한다. 월드컵 개최국민으로서 애국심에 어느 축구장에든 한두 번 가 주고 말 게 아니라 작정을 하고 한 팀을 골라서 평생토록 따라다니자. 축구장에는 당신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대표하는 당신의 팀이 있어야 한다. 못하는 팀이어도 좋다. 자기 팀을 갖자. 자기 팀에서 뛰자. - 축구는 정체성(identity)이다."
 
2. Atmosphere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분위기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표현 속 '분위기'는 운동 경기장의 '분위기'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전혀 다른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 분위기'! 혹은 '점잖고 그윽한 느낌의 사람이 풍기는 은은한 분위기'! 이 때문일까? 영어권에서 스포츠 얘기를 나눌 때 쓰는 'atmosphere'란 단어를 '분위기'로 단순히 번역해 쓰기는 참 어색한 일이다.
 
영국의 축구잡지 같은 데서 가끔씩 축구 전반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룰 때 보면, 다른 굵직한 영역과 함께 'atmosphere' 란 영역을 별도로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과연 어떤 분위기 얘기를 하는 것일까? 경기장 곳곳을 밝은 색으로 칠하자? 쾌적한 환경을 위해 경기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자?
 
다들 거기 '앉아서' 경기를 보는데 '스탠드'는 왜 '선다'는 뜻의 'stand'일까? 원래 영국에서는 빽빽이 들어찬 관중들이 앉지 않고 혹은 앉지 못하고 다 서서 경기를 봤다고 한다. 그래야 같은 경기장에 몇 명이라도 더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기 자리란 개념이 없어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게 되면 좋은 자리를 빼앗기게 되니 관중들은 대부분 확보된 자기 자리에서 볼 일을 보곤 했다는 얘기까지.. 오늘날 축구장 묘사에도 소변 혹은 소변 냄새는 매우 흔히 언급되곤..
 
이런 축구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참 많은 사람이..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의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96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잘못된 출입통제로 인해 너무 많은 관중이 일시에 좁은 공간으로 몰려들다 펼쳐진 참사. 전쟁도 테러도 아닌, 축구장에서 벌어진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악명 높은 '훌리건' 문제를 풀기 위해 본의 아니게 '스포츠 사회학'의 원조가 돼 버린 나라, 영국. 1984년 5월 29일 유러피언컵 결승전날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유벤투스 서포터 사이의 난투극 가운데 39 명이 사망한 헤이젤 참사도 빼놓을 수 없고..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클럽팀은 5년, 리버풀은 7년간 국제경기 출전 금지 조치를 당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힐즈버러에서 또 참사가..
 
반복된 참사 이후 영국은 '테일러 리포트'라는 보고서에 입각,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 '입석 폐지, 좌석제 전면 시행'이다.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 각종 경기장을 섭렵한 사람으로서 볼 때 좌석 위주의 경기장은 혹 우리가 더 빨랐던 것 아닌지.. 그러나 같은 시기 영국 축구장에 관중이 그리 많지 않았다면, 아무리 서서 보는 곳이란 뜻의 '스탠드'라지만 다들 편하게 앉아서 경기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여하튼 개혁의 핵심은 관중석을 반드시 좌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입추의 여지 말고 입석의 여지없이..
 
이런 나라에서 어느 날 내가 놀랍게도 목도했던 것은 경기장 '분위기', 바로 'atmosphere'를 위해 부분적으로라도 입석을, 전형적 의미의 스탠드를 재도입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의견 피력. 월드컵 규정에 따라 좌석을 잠시 깔았다가 월드컵 마치고 서포터석을 스탠드로 다시 전환한 독일의 일부 경기장을 내가 알고 있기는 하지만, 스탠드에서 사람이 숱하게 죽어간 나라에서 이와 같은 것을 다시 언급하다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에도, 일종의 금기까지 깨 가며 꼭 거론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 '분위기'. 이 '분위기'를, 경기 혹은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렇게까지 할 일은 전혀 없을 터인데.. 그러나 비난의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꼭 도모하고 싶은 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여하튼 영국에서 '분위기'라는 말은 이렇게 우리와 사뭇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5만 관중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경기장이 숱한 사람들의 상상만큼 많지 않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프로축구 경기 가운데 연례적으로 4~5만 관중을 모으는 경기가 있다. 수원 삼성과 FC서울의 이른바 슈퍼매치. 이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우리 축구도 이제 본바닥 유럽 수준으로 성장했구나!' 뿌듯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볼만한 지표가 적잖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영국 혹은 유럽의 '분위기' 잣대를 제대로 들이대면..
 
우리나라엔 아직 중립 관중의 수가 너무 많다. 이를테면 경기를 지켜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참여를 하고 있는 양 팀 서포터를 각 만 명씩 어림잡아 2만 명 정도로 놓고 볼 때 나머지 3만 명은 이른바 중립 관중으로 볼 수 있는데, 과연 이들은 경기장 분위기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까? 혹 마이너스 요인은 아닐까? 응원에 적극적인 사람이 실은 더 많고 중립 관중은 더 적다고 해도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유럽엔 중립 관중이 거의 전혀 없다. 자기 팀에 목숨을 걸고 그 팀과 운명을 함께 하는 정체성 충만한 진성 축구팬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하여튼 축구를 좋아한다'는 애매한 사람이 기껏 그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어지간한 뮤지컬 표보다 비싼 축구장 입장권을 구입해 경기장에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씀.
 
'분위기'를 위해서도 '정체성' 문제는 꼭 해결을 해야만 한다.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 곳에서는 중립 관중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곳에서는 중립 관중을 위한 별도의 배려를 고민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또 충분히 달아오르지 못할 경기장 분위기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분위기가 좋은 분위기인가? 일단은 가득 차야 한다. 한두 해 전에 경기도 모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고교축구 라이벌전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주말리그 공식 개막전으로 정해져 TV로 중계도 된 경기인데, 축구협회에서 가설 관중석을 모양 있게 설치했고 경기를 벌이는 양교 학생들이 그 관중석을 그야말로 가득 채웠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말 '예상 밖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냥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그냥 축구를 본 것뿐인데..
 
관중이 많아진다고 갑자기 고교축구가 대학축구 혹은 프로축구의 수준이 되지는 않는다. 재미도 마찬가지. 그러나 시끌벅적한 잔치상과 나 혼자 구석에서 대충 한 끼 때우고 마는 일을 어찌 비교하랴! 기억하자. 무관중 경기는 징벌이거나 연습경기라는 사실을..
 
그런데 관중이 많다고 해서 경기장이 늘 가득 차는 건 아니라는 사실. 체험적으로 볼 때 '많이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득 채우는 것'이다. 관중의 숫자가 결코 적지는 않지만 큰 경기장을 가득 채우지 못해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사례는 워낙 많아 굳이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다. 또 관중이 가득 차지 않는 경기, 표가 남아도는 경기는 그 절대성을 온전히 인정받기도 어렵다. 혹 내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입장권을 맘먹는 대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면, 난 더 이상 엘 클라시코 관전을 꿈꾸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럽 사람들이 큰돈 들여 애써 구매하는 축구장 분위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미안하지만 영어단어를 하나만 더.. 유럽의 축구 팬들은 상대편에게 'intimidating'한 분위기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다. 이 단어 역시 내가 생각해 낸 단어가 아니라 역시 영국 사람들이 축구 얘기할 때 자주 쓰는 단어라 익숙해지게 된 것인데, 이 말은 '자신감이 없어지도록 겁을 주는'이란 뜻으로 공자님 말씀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좋아해서 마구 인정해주고 장려해 마지않을 태도는 결코 아니다.
 
얘기를 또 어떻게 풀어볼까? 역시 과거 내가 쓴 책에서 일부를.. 내 글이니 표절이라고 할 것도 없으므로 마음 놓고 실컷.. 안 그래도 'intimidating'을 언급한 부분의 앞뒤로..
 
"우리가 무조건 유럽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각 구단이 홈팬들을 확실히 사로잡지 못하고 매 경기 변변한 홈 어드밴티지 없이 경기를 벌인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홈 어드밴티지를 구성하는 것은 비단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만은 아니다. 홈팀 선수들에게 익숙한 모든 것은 홈 어드밴티지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익숙한 경기장 시설 같은 것은 거의 고정된 불변 요소로서 매 경기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관중들의 열기는 경기 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가변 요소다. 일단 홈 경기장 등 어지간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면, 홈 어드밴티지를 극대화해서 홈팀의 승리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역시 이 가변 요소의 몫이다."
 
잠시 중략하고..
 
"축구장에서 어느 한쪽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게 착하디 착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 축구장 분위기는 대체로 불편 부당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당파성을 찾기보다 애쓴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5대0으로 프랑스에 패한 대표팀에게도 썩은 계란 대신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이 월드컵 같은 대형 국제대회에서 intimidating한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16강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FIFA 랭킹이 얼마나 참고할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FIFA 랭킹은 40위 안팎으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입할 가능성은 산술적으로 대단히 희박하다. 그러나 여느 때보다 16강 진출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은 바로 홈 어드밴티지 때문이다. 하지만 지극히도 공격적인 팬들의 극성스러운 응원에 익숙한 해외의 강팀들이 한국인의 순진한 응원에 크게 주눅이 들지는 잘 모르겠다. 국가대항전 분위기가 국내 팀끼리의 경기 때와 사뭇 다르기는 하겠지만..
 
극렬한 훌리건이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안 그래도 혹시나 악한 일을 선동하게 되지 않을까 내심 무척 조심하고 있다. 이 와중 그래도 힘주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숫자만 채우는 소극적인 축구 팬이 아니라 재미없는 경기도 재미있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적극적인 축구 팬이 되자’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 팀을 이기게 하는 실제 전력이 되자’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해 버릇하지 않으면 2002년은커녕 3002년이 돼도 월드컵 16강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2002년에 월드컵 4강에 올랐으니 달리 더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좋은 성적과 무관하게 글의 내용은 여전히 울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글이라 차마 극찬까지는 못하겠지만..
 
리버풀의 전설 빌 섕클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Some people believe football is a matter of life and death, I am very disappointed with that attitude. I can assure you it is much, much more important than that.”
 
번역하면,
 
"어떤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와 같은 태도는 지극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축구가 생사보다 훨씬,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확신한다."
 
이 얘기를 액면대로 받아들이든 말든 스포츠가 정말 중요한 문제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이 이상 뭘 또 바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늘 조금만 새로운 시각으로 사태를 새롭게 돌아보면 뭔가 또 새로운 경지가 우리 앞에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일. 새로운 개념과 함께 스포츠의 유익을 더욱 온전히 누리고 만끽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아내가 글을 죽 읽어 보더니 한마디.
 
"결국 또 정체성 얘기네!"
 
그렇다. 둘로 나눠 썼지만, 결국 또 한 가지, '정체성'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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