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스 Aug 19. 2022

유학생에게 루틴이란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경계에서

여보세요~?


매일 아침 나의 첫마디다. 아침마다 부모님께서 모닝콜을 해주신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미국에 보내셨기 때문에, 아니 사실은 내가 부모님과의 대화를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통화를 한다. 이 전에는 미국 시간으로 밤에 통화를 하다가, 조금 더 일찍 잠들고 아침에 일찍부터 활동하라고 아침에 전화를 주시기로 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면 내가 먼저 하겠다고 했지만, 아침잠이 참 많아서 성공한 적이 거의 없다. 아침부터 부모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나의 하루는 늘 기분 좋게 시작한다. 가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져서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유학생에게 그리움은 늘 간직하고 사는 거니까.


스트레칭하면서 통화를 마친 후에는 양치를 하고 세안 및 스킨케어를 한다. 한국 프로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침 야구 시청과 함께 모닝 루틴을 이어나간다. 일어나서 처음 몸에 넣는 것은 물이다. 물을 2리터'만' 마시기 위해 노력하는 나는 기상 직후 500ml 정도의 물을 원샷한다. 다음에는 유산균, 홍삼액, 그리고 콜라겐을 털어 넣는다. 홍삼과 유산균을 먹었으니까 공복이 아니라는 핑계를 대면서 아침으로는 커피를 마신다. 라테를 마시기도 하고 블랙을 마시기도 한다. 원래는 아침에 물을 마시고 바로 커피를 마셨는데, 나이와 함께 서서히 세 가지 건강식품이 추가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스케줄을 정리하고 다이어리를 적는다. 시간이 남으면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한다.


8시 50분부터는 일을 시작한다. 회사에서 코로나와 관련된 대시보드를 제공하고 있는데, 매일 코드를 돌려서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는 일을 내가 담당하고 있다. 업데이트에는 10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9시부터는 연구나 다른 업무를 할 수 있다. 12시까지는 연구 혹은 일을 한다.


나에게 스스로 준 점심시간은 1시간이다. 나는 식사 속도가 느린 편이기 때문에 1시간은 빠듯하다. 요리를 거의 하지 않고 데워먹거나 물을 부어 먹는 게 다 인데도 밥을 먹고 양치를 하면 1시간이 거의 끝나 있다. 학생 때는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고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놀기도 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했던 거지.


1시부터는 다시 일을 한다. 50분 공부 10분 휴식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한두 시간 훌쩍 그냥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다. 5시부터 6시까지는 저녁 식사를 한다. 저녁은 주로 간단하게 먹기 때문에 시간이 좀 남는다. 그 시간에는 청소를 하거나 취미 생활을 한다. 요즘에는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6시부터는 다시 일 및 연구, 10시까지 할 일을 마치고 운동을 하거나 저녁 시간을 즐기는 게 내가 목표하는 하루 루틴의 마무리다. 물론 하다 보면 11시-12시까지 금방 넘어가는 날도 많지만. 취침 전엔 다음날의 계획을 세운다. 


토요일을 제외하곤 매일 같다. 한 동안은 일주일 내내 이렇게 살았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껴서 토요일만큼은 외출을 하거나 푹 쉬기로 정했다. 




이 루틴은 지금 상황에 맞는 목표일 뿐, 사실 나에게 이상적인 루틴은 아니다. 나의 MBTI는 ESFP다.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혼자서 일하는 것도 싫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시간표를 짜고 집에서 혼자 일하는 것은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업무 방식이다. 지금 내가 주로 지키고 있는 루틴이 지배한 이 삶은 온전히 '가짜의 나'를 담은 것이다.  

 

유학을 오기 전 '진짜의 나'는 기상 후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 이후의 루틴 따위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도 일주일 동안 시간표가 매일 달라서 정해진 통학시간도 없었다. 일주일로 치면 나름의 규칙은 있었지만, 매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 적은 없다. 외출 후 시간이 남는 날에는 집 앞의 카페에 다녀오기도 하고, 어머니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저녁에는 운동도 했다. 일주일에 4-5번 정도는 동네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한 때는 헬스장 운동 이후 요가를 다녀오기도 했고, 오는 길에 친구에게 연락해서 맥주 한 잔 하거나 부모님과 강아지를 데리고 밤 산책을 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과외를 하거나 단기 알바를 했다. 콘서트를 가거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새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쇼핑을 하기도 했다. 알차게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나의 하루는 늘 길었다. 


그때에 비하면 확실히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일을 많이 한다. 일을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다. 취미 생활도 금방 끝낼 수 있거나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것, 어디 가지 않아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하게 되었다. 주어진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 혹은 자기 전에 할 수 있는 취미를 즐긴다. 1분 단위로 시간 계획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지금 나의 일상에 즉흥은 거의 없다. 즉흥적으로 어디 다녀오거나 무언가 하고 싶을 때가 상당히 많지만 하지 않는다. 다음날에 밀린 일을 하며 괴로울 것임이 예상되기 때문에.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지만 결과는 잘 나오지 않는다. 분명 하루 종일 일을 했는데 하루를 돌아보면 한 게 없다. 일을 이렇게나 많이 했는데 뿌듯하지가 않다. 


루틴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가 터진 이후였다. 코로나 시대가 열릴 때 즈음 나는 박사 2년 차였다. 자격시험도 통과했고 맘 편히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는 학교에 직접 갈 필요도 없어서 좋았다. 문제는 국제기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연구를 할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 때나 들어오는 일을 처리하다 보면 밤이었다. 코로나와 관련된 업무이기 때문에 항상 급한 일이었다. 밤 11시에 들어오는 요청에도 웃으며 답을 주었다. 일 자체는 연구보다 재밌었지만, 연구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다 보니 논문이 답보상태였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업무 시간을 스스로 정해놓고 일을 하면서 연구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다 보니 위의 루틴이 생긴 것이다. 


과연 지금 나는 예전보다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걸까. 루틴은 좋은 거라고들 한다. 부모님께서는 적어도 기상시간만큼은 일정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루틴을 열심히 지키는 지금, 나는 부지런한 것이 맞는 걸까.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았던,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루틴이 딱히 없었던 그때가 지금보다 게을렀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정해진 루틴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게으른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를 즐겁게 해주는 일을 미룬다.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도 미룬다. 행복을 미룬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미룬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연구와 일'을 부지런히 하기 위해 인생에서 가장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을 게을리하고 있다. 부지런한 삶을 살기 위해 게을러지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탈출구를 향해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일 뿐. 다른 어떤 묘수를 쓰더라도 나아가지 않고서는 출구로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일도 부지런하고 또 게으르게 살아갈 것이다. 버티다 보면 곧 탈출해서 '나'를 위해 부지런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여러 진로 고민과 내적 갈등으로 조금 힘든 상황에서 글을 쓰다 보니 초반 글들이 다소 암울하네요. 허허. 하지만 저는 나름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는 더 다채롭고 재밌는 저의 삶도 담아볼 예정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대학원생은 그냥 대학원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