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사람의 감사함
남편을 먼저 미국으로 보낸 후, 내 일에 대해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분명 커리어를 이어가고는 싶지만 또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까지 내가 이 일을 우선 가치를 두고 있나?
가끔 ’배우자의 유학 동반‘ 명분으로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만둔다면 아쉬울 부분이 뭔지 사소한 부분까지 생각해봤다.
퇴사 후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수년 후에는 오랜 경력 단절로 직장생활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텐데, 이곳이 내 직장생활의 종착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왔고 결론이 안 날 때면 생각을 다음날로 미루곤 했다.
어느 날에는 친한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나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출산, 육아 휴직 외에도 다른 종류의 의원 휴직이라는 것이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어서 눈이 희번덕해지고, 처음으로 그때에 나에게도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남편과 함께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때쯤 내가 속한 팀에 다른 회사에서 이직해온 새로운 팀장이 왔다.
깐깐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녀가 일하는 방식과 태도에서는 배울 점이 많았다. 당시에 나는 브랜드 전체를 리뉴얼하는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그녀의 장점은 목표와 근본적인 지향점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하나로 모으는 것, 사적 야망으로 본인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팀원들의 생각이나 입장은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공정하게 일을 배분하고 각자가 책임지게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적절한 선을 유지하며, 같이 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잘 되게 하는 것만을 우선시했다.
가장 크게 배울 점은, 리더로서 분명한 의견과 목적을 이야기해서 팀원들에게 가급적이면 기분 좋게 설득을 해서 일을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요도에 따라 마이크로 매니징 하는 부분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놓치고 부족한 부분들을 배워나갔다.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정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고, 주어진 업무를 최선을 다해줄 거라는 믿어주는 것. 신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신나게 일할수 있는 일인지를 이분을 만나 큰 프로젝트를 이끌며 직장생활 9년 차에 배워 나갔던 것 같다.
이 프로젝트는 파리에 있는 디자인 에이전트 ’Servaire&Co.’라는 곳과 함께 협업해서 출장을 여러 번 오갔다.
이 에이전트와의 합은 꽤 좋았다. 부부가 공동 CEO인 점도 마음에 들었고 남편 세바스찬은 제품 디자인, 아내인 에밀리가 인테리어 디자인 부문을 총괄을 해서 능력 있는 담당들을 우리 프로젝트 팀으로 배치하고 우리가 의뢰한 방향대로 늘 기대 이상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들의 사무실에서 두 번째 미팅을 잘 마친 후, 팀장과 둘만의 기분 좋은 식사자리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배우자가 해외로 장기 유학을 떠나 얼마나 떨어지게 될지 모르는데, 배우자 동반의 의원 휴직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초반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내가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을 위로하며 자신이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선례 없는 일을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노력해보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선 프로젝트 보고를 성공적으로 마쳐보자고 했다.
7개월간 진행한 프로젝트는 최종 보고까지 잘 마쳤다. 그 이후 팀장은 약속한 대로 임원들에게 내 이야기를 잘 전달해주었고 인사팀과 임원들의 몇 차례의 면담 등 관문을 지나며 마침내 나는 첫 유형의 배우자 동반 휴직을 얻게 되었다.
프로젝트와 새로운 팀장을 잘 만난 것, 신뢰를 얻으며 일한 것이 나에게 큰 기회이자 전환점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
2016년 12월 중순의 한 주말,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처 정리 못한 부분까지 모두 인수인계 파일 정리를 하고 짐을 빼고 난 후, 사무실의 텅 빈 내 자리를 보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에 대한 애정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게 해 준 브랜드, 프로젝트 그리고 멘토 같은 팀장에게 감사한 마음이 밀려왔다.
9년 동안 한 직장에서 경험한 다양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마지막에 배울 점이 많은 리더와 함께 일해본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 그리고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고 휴직 생활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나의 동료들이 벌써부터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껏 후련함을 느끼며,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던 남편을 보러 갈 생각과 나의 첫 (독립적)해외살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서둘러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