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국 생활 시작

인생의 선물 같은 시간

by 스트리밍

우리 부부는 떨어져 지낸 지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워싱턴 D.C 국제공항에 꽃다발을 들고 마중 나온 남편을 만나고 나서야 실감이 나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정착해있는 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 한식 재료를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작은 아시안 마트밖에 없었다. 이렇게 멀리 대도시로 나오는 일은 바쁜 유학생에게 연중행사이기 때문에 공항 근처 대형 한인 마트에서 약 한 달치의 장을 봐서 트렁크가 터질 듯하게 실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국 음식이 그리웠을 남편과 순댓국을 먹은 후 4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해서 드디어 사진에서만 보던 우리가 앞으로 함께 살아갈 안락한 블랙스버그의 집에 도착했다.

안락한 시골 동네

한국과는 사뭇 다른 아파트, 자연, 교통 표지판 등을 보며 산책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새로운 시작’ 임을 느꼈다. 무엇보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청량한 공기, 고층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뻥 뚫린 하늘을 하염없이 볼 수 있는 것이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첫날은 짐을 풀고 나서 길가 벤치에 앉아 하늘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는데 순간은 아직도 가슴속에 사진처럼 품고 다니고 있다.

다음날에는 운전면허 발급, 어학 학원 등록, 각종 보험 가입 등등 행정적인 일 처리들을 하고, 며칠 후에는 남편이 미리 계획한 연말 홀리데이 시즌과 우리 부부의 재회를 기념으로 플로리다주 여행을 떠났다.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매년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고 낯선 생활을 여행으로 시작하니 해외 살이 중에 이때가 가장 설레고 꿈같은 시간이었다.

모래 눈사람, 연말도 한여름 날씨인 남쪽의 플로리다 주

어학연수 생활, LCI

남편이 다니는 학교에는 LCI(Language and culture institute)라는 어학학원이 있었고, 배우자는 어학학원을 비교적 저렴하게 다닐 수 있는 점이 큰 혜택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기혼 유학생들의 배우자들은 대부분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곳에서 언어 공부도 하면서 한국인 동료들도 사귀고, 좋은 선생님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한 반에 10여 명 정도가 정원인 이 수업은 대부분이 만 18-19살인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로, 대학 진학을 위해 영어를 배우는 중동 국가의 남학생들, 가끔은 중동 여학생도 있었다. 중동에서 온 학생들이 많은 이유는 자매결연을 맺은(석유 재벌이 많은) 나라에서 학비와 월세를 대부분 지원해주는 제도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왜 하필 이런 시골에 공부를 하러 올까 싶었는데 도시보다는 물가가 확실히 저렴하고 즐길 거리가 없는 정적인 동네라는 점에서 그들의 부모들이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됐든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예멘 등의 중동 10대 학생들과 한 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생경한 경험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사를 진학하기 위해 온 한 여학생은 기혼 여성으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는 눈을 맞추며 오랜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이 터부시 되어있고, 그 나라의 여성은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눈을 제외한 전신을 검정 천의 ‘니카브’를 늘 두르고 다녔는데, 가끔 물이나 커피를 마실 때 조차도 천 안으로 조심스럽게 컵을 넣었다 빼는 모습은 기이했다. 반면에 쿠웨이트는 중동 국가 중에 가장 여성인권이 강한 나라라고 하는데, 30대 초반 정도 보이는 남자는 아내가 이곳 대학교수이고 본인은 아이 넷을 육아하며 아이들이 기관에 가있는 동안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평소에는 전혀 접할 일이 없는 낯선 나라의 학생들과 한 반에서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중동이라는 나라의 특성과 그들의 정서를 옆에서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한 학기가 끝나자 주말 포함 일주일의 방학이 주어져서 나는 서부에 살고 계시는 막내 이모와 친구 집에도 다녀왔다. 미국의 영토는 워낙 거대해서 같은 나라라고 해도 비행기로 몇 시간 가야 하는 거리지만 친척과 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심적으로 큰 의지가 되었다. 그렇게 친정을 다녀온듯한 따뜻함과 충만함을 안고 돌아온 후에 나는 몸 상태가 예전같이 않았다.


그때 나의 딸이 축복처럼 찾아와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