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쉽지 않은 워킹맘 대장정

by 스트리밍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일하는 동안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내 아이의 어린이집이었다. 그때 기대 없이 대리 추첨했던 직장 어린이집에 합격소식을 듣자 세상을 다 얻은 듯 너무도 기뻤었다. 안정된 환경에서 양육과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꿈만 같았다.


귀국하자마자 나와 아이 둘이 지낼 집을 보고, 살림을 채워나가고, 가족들과 소박하게 내 아이의 돌잔치도 했다.

내 아이의 첫 번째 생일

이후 같이 한국에 와있던 남편은 남은 박사 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아무리 잠정적 이별이라 해도 헤어짐이 익숙해지는 법은 없다. 멀지 않은 미래에 '확실한 행복'이라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우리는 각자의 주어진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드디어 나의 일터로 복직하는 날,

내 직장은 신사옥으로 이전하여 물리적인 환경뿐 아니라 업무 시스템까지 모두 바뀌어 많은 것들이 낯설었다. 복직하는 첫날, 직속에서 준비해준 꽃다발과 손편지로 환영을 받고 나니 일터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기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앞으로 힘든 날이 와도 이날의 감정을 고이 간직하며 꺼내보자고 다짐했다.


워킹맘의 현실은 내가 상상해온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워킹맘의 하루하루는 늘 중요한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에는 늘 비상상황이 생기고 육아 지원과 나의 체력, 시간이 늘 쫓기듯 부족했다. 특히 아이에게 크고 작은 사고가 났을 때에 감당하기 버거웠다.

첫 1년의 터널만 지나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워킹맘 선배들의 조언을 믿고 딱 1년의 시간을 버티던 중에, 코로나 팬데믹과 내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위기가 닥쳐왔다.

왜 부정적인 일들은 도미노처럼 일어나는지, 한동안 몸과 마음이 무너질듯하고 심연의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신체적 고통은 고독이라는 것이 뼛속 깊이 느껴지고 가장 근본적인 외로움과 서러움이 직격탄을 맞는 경험이다. 특히 새벽에 소스라치게 아픈 통증으로 깰 때 어둠과 정적 속에서는 사무치게 외로운 감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에게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힘든 점을 털어놓으면 도움 주실 나의 부모님, 이때 나에게 손 내밀어준 나의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남편. 나의 고통에 집중되어있을 때는 안보이던 것들이 몸과 마음을 챙기고 조금씩 회복하고 나니, 가까이 있고 소중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혼자라는 마음에 사로잡혀있을 때 모든 일이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유독 너무 힘든 터널을 지날 때에는 하루하루에 갇혀서 그런 날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고, 내가 잠시 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갈 곳을 잃은 유기된 것 같은 마음은 그 누구도 챙겨줄 수가 없다.

그런데 혼자라는 기분 일지라도 돌아보면 온전히 나 혼자인 적은 없었다. 방 안에 혼자 인적은 있어도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내가 생각하는 것들도 다른 누군가로 영향을 받고 빚어진 것들이고, 미래를 그릴 때도 누군가는 항상 걸쳐져 있다.

걱정도 기대도 아무것도 계획했던 대로 차곡차곡 일어나는 경우는 잘 없듯이 마음이라는 것도 묶어둔다고 꼼짝없이 묶여있는 것도, 풀어놓는다고 해도 한없이 헝클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의 외로움과 속상함도 내가 믿는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생각지 못한 깊은 의견과 따뜻함으로 큰 위안과 나의 삶에 작은 씨앗이 되기도 한다. 외로움이라는 것을 애써 억누르거나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잘 다룬다면, 나뿐 아니라 타인의 외로움도 이해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을 다독이고 부정적인 기운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법을 배워나갔다.

크고 작든 모두가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을 품고 살아가고, 나의 연하고 취약한 부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치유해나갔다.


힘든 터널을 지날 때에는 고민과 고통을 이고 쥐면서 달처럼 커다랗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지나고 돌아보면 어느새 멀리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시점이 온다.

모든 과정들은 내가 견딜 있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고통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아기에서 어린이로 같은 공간에서 꽉 채운 3년, 이제는 진한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