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드로잉
인체드로잉을 한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인체드로잉 중, 누드크로키는 1분이나 2분, 혹은 30초 안에 완성하는 빠른 작업이다.
손은 현재 모델의 포즈를 끝내지도 못했는데, 모델은 천천히 다음 포즈를 취한다.
눈은 바뀐 포즈를 그리고, 손은 그전 포즈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다시 다음 포즈를 그린다. 크로키의 진행방식이다.
그 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묘하게 중첩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이 개입될 여지는 별로 없다.
그래서 작업의 매 순간,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몰입의 순간, 감각은 사라지고 주변은 멀어지고,
호흡과 대상만 남는다.
그 순간 속에서 작업하는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있지 않은 존재가 된다.
다시말해, 우리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누드크로키는 철저한 주관의 드로잉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다.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누드’라는 주제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예술적 영감을, 누군가에겐 원초적 자유로움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누드크로키는 '명상'이다.
크로키를 통해 몰입된 그 시간은 내면의 온전한 나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누드크로키는 인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선물한다.
그리면 그릴수록,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어떤 몸이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건 인체의 황금비율, 외모나 성별 등의 외적인 요인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아름다움, 우리의 의식이 담긴 ‘몸’에 대한 경이로움이자,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짧은 시간 안에 그리는 크로키는 모든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다.
작업한 날의 드로잉이 모두 작품이 되지도 않는다.
수없이 버리고, 선택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고, 완벽과 거리가 멀어서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