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미술관 전시실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작품 설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저 나이 때 이런 위대한 작품들을 봤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나는 고등학생 때야 처음으로 미술관이라는 곳을 가봤다. 요즘 제주에야 국립박물관과 도립미술관도 있고 사립미술관과 상업갤러리는 더 많지만 내가 자랄 땐 디오라마 몇 점 설치된 민속자연사박물관이 전부였다. 그렇게 미술관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던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미술관은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였다.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도 없던 시절 종이지도 하나 들고 부모님과 북미 종단여행을 하다가 들린 곳이었다.
사전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때 정확히 뭘 봤는지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막연히 오래된 물건들에서 나는 냄새와 대리석 건물의 매끈함과 웅장함이 좋았던지도 모르겠다. 벽에 걸린 것들은 뭔지 모르겠으나 내 머릿속엔 질문 하나만 남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려면 뭘 해야 하지?
내셔널 갤러리에 다시 가는 데 까진 그 후로 12년이 더 걸렸다. 머리가 조금 더 커지고 가서 보니 고등학생 어린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화려한 그림들은 네덜란드 정물화였다는 걸 깨달았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닌 이웃 스미소니언 프리어새클러 갤러리(현 국립동양미술박물관) 연구원으로 워싱턴 DC 입성 후 갔으니 누군가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거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
여행에서의 충격은 현실로 복귀하면서 희미해졌고 나는 여느 고등학생, 대학생처럼 진로와 전공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엉뚱하게 학부에선 중문학, 대학원 석사과정에선 중국미술사 전공으로 졸업한 후 정신 차려보니 여러 박물관과 문화재 관련 기관을 비정규직으로 전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생처음 미술관을 방문한 후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 까진 꼬박 20년이 걸렸다. 게다가 난생처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네덜란드 정물화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중국미술 큐레이터로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네덜란드 정물화였을까 곱씹어보면 20년 걸려 닿은 곳이 완전히 동떨어진 곳만은 아니다.
서양미술사 교양강의를 들어봤거나 서양미술 관련 시중 서적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네덜란드 회화에 대한 설명으로 익숙한 내용이 있을 거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화 대신 정물화와 풍경화 수요가 늘어났다던지, 정물화에 종종 등장하는 도자기와 은기는 동인도회사 무역의 성과를 보여주는 반면 과일 껍질, 뼈, 먹다 만 음식 등은 바니타스를 상징한다던지, 그런 내용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배경 지식이 일절 없던 나에게도 네덜란드 정물화가 주는 충격과 즐거움은 충분히 컸다. "와, 이 꽃이랑 벌레들 좀 봐, 진짜 같다!" "어떤 안료를 혼합해서 저렇게 예쁜 튤립과 장미색을 만들었지?"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평생 그림을 볼 수 있는 즐거움으로 안내해 준 게 아닐까 싶다. 그림 속 개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진 유리컵과 굴 껍데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 빠져들며 꽃잎 위를 기어가는 벌레들과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기가 없던 시절 일상의 모든 사소한 것도 숨 막힐 정도로 관찰한 화가들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엿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만약 어려서부터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들을 일찍이 접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딱히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알면 어련히 이 바닥으로 끌려오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예쁜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어디서부터 뭘 봐야 할지 모를 때도 있거나 삐딱하게 보게 될 수도 있고 까칠한 반응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아마도 이곳에선 미술이 주는 불친절함을 종종 토로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