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양주, 로컬, 그리고 술을 빚는 마음
전공은 광고홍보로 출발했지만, 어쩌다 20대 중반 나를 위한 가장 큰 광고를 진행했다. 술을 쫓아 글과 그림, 자전거 바퀴 자국으로 세상에 나를 기록한 덕분에 그토록 바라던 크래프트 맥주 씬에서 근무를 했고 그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 로컬, 환경을 다루는 업으로 이어졌다. 큰 기업의 캠페인을 기획, 운영하는 일을 담당하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큰 조직의 구조와 실행력을 가까이서 보았다. 동시에 미처 섬세하게 닿지 못하는 지점들을 보면서 ‘생산자’의 입장과 역할을 고민하게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지역 양조장을 운영하며 쌀로 빚은 술에 다채로움을 더해가고 있다.
어쩌다 보니 양조장 대표님들만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 자리엔 10년 이상 베테랑부터 3년 차, 이제 막 양조장 면허를 받은 대표님까지. 최근 들어 양조장 창업 준비를 하고 있는 분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말했다.
“난 무조건 말릴 거야.”
“그러니까요. 저도 그럴 거예요.”
한쪽에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다른 한쪽에선 격한 공감의 끄덕임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한 대표님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고, ○○막걸리 물량이요? 문제없습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날 무렵, 내가 왜 이 힘든 일을 견디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양조장을 운영한다는 건 술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책임이 따른다. 이제는 ‘양조장 대표’라는 수식어가 한 몸이 되어, 창고에 쌓인 쌀이나 발효 중인 술의 양보다 지킬 것들이 더 많아졌다.
서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명함을 주고받다 보면 통하는 마음들이 있다. 우연이든, 정말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든 지금보다 더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러니 내심 누군가의 창업이, 술을 대하는 태도가 ‘가볍게’ 만은 아니길. 분명 누군가 힘들 거라고 말렸음에도 시작한 일이기에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심지를 심어 놓고서 오래 버티고 지켜내는 방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찾고 있다.
통화가 끝난 뒤, 우리는 중얼거렸다. “역시나 말릴 때 하지 말았어야 했어…”
국내에 많은 양조장들이 생겼다. 2022년 창업 당시만 해도 전통주 제조 면허 수가 1,400여 개. 지금은 그보다 훨씬 많아졌다. 아침에 눈만 뜨면 SNS에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술 소식이 스크롤을 내리는 내 엄지 속도보다 빠르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와중에 폐업 소식도 들린다. 문을 닫는 양조장뿐만 아니라, 즐겨 찾던 주점, 전통주 바틀숍 그리고 동종 업계분들의 퇴사 소식까지. 연이은 산업군에서 곡소리가 나올 때마다 가끔 힘이 쭉 빠지는 때도 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소비는 위축되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진다. 2017년을 기점으로 성장세를 보이는 전통주 시장이지만 여전히 규모가 작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주요 소비층이 젊은 층으로 확대되는 추세지만, 여전히 특정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는 한계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움직임과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매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변화의 흐름은 점점 더 유연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전통주가 특정한 방식으로만 소비되었다면, 칵테일, 푸드 페어링, 브랜드 협업 등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다. 소비자들도 단순히 ‘술’이 아니라 ‘경험’을 찾고 있다. 새로운 맛을 탐험하고, 술이 가진 스토리를 공유하며, 한 병의 술이 가진 개성과 가치를 즐기는 문화가 점점 더 자리 잡고 있다. 전통주가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이 변화의 흐름은 눈여겨볼 만하다.
한식과 함께 전통주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미식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통주를 새로운 한국의 문화 콘텐츠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특히, 지역의 특색이 담긴 술은 ‘로컬리티(Locality)’를 강조하는 글로벌 트렌드와 맞물려 더욱 주목받고 있다. 브루펍을 운영하며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 중 하나이다.
이제 전통주는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통의 가치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고, 새로운 시도와 협업을 통해 다채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장(醬)과 마찬가지로 전통주에는 집안 고유의 문화와 환경, 지역 인근에서 나는 재료가 자연스레 담긴다. 쌀, 물, 누룩 기본 재료 위에 집집마다 개성과 시간이 더해져 가양주 문화가 꽃피워졌다. 그렇다면 꿀꺽하우스를 하나의 '집'으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어떤 술을 빚어야 할까? 더 나아가, 이 술을 매개로 어떤 문화와 이야기를 빚고 싶을까?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질문을 계속 붙들고 왔지만 양조장을 오픈하고 4년 차를 앞둔 지금, 조금 달라진 게 있다. 나는 재해석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전통주가 가진 ‘가양주’의 정신, 그 안에 담긴 삶과 철학, 개성, 지역의 결을 우리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처음 내가 크래프트 맥주 문화에 빠지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꾸준히 움직이고, 이야기가 쌓일 수 있도록. 과거의 문을 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금과 연결된 재료, 생산자, 계절, 삶, 기술. ‘변해가는 것들’을 술에 담고 싶었다.
발효는 다양한 미생물이 공존하는 과정이다. 그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개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전통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재료와 실험을 통해 우리 술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한다. 마치 서로 다른 미생물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며 예상치 못한 풍미를 만들어내듯, 꿀꺽하우스도 전통과 현대, 익숙함과 새로움이 만나는 경계에서 우리만의 맛을 빚어내고자 한다. 공존과 경계에서 피어나는 맛의 스펙트럼.
그것이 내가 술을 시작한 이유였고,
이 지역에서 곱게 빚어 펼쳐가고 싶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