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요리조리 눈치는 좀 있어야 돼
어렸을 때부터 어디 가서 든 '잘 먹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이다. 음식을 먹는 것에는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까다로운 미식가는 아니다. 먹방 인플루언서들처럼 대식가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하도 산만해서 가만히 있지 않은 덕분에 일반인 평균보다 기초대사량이 올라가 있어서 즐겨 먹는 정도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지만 조금만 매워도 먹지 못하고, 국물류는 사골국과 미역국만 먹는다. 라면 애호가지만 국물은 먹지 않는다. 면을 많이 먹는다. 간장, 초고추장 등 장도 가급적 찍어먹지 않는다. 이 정도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입맛이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맛있는 술안주라고 하면 안주만 먹는다. 술도 마시지 못하기에.
이렇게 잘 먹는 것에 비례하여 요리 실력도 상급이면 좋겠으나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끓이는 라면이다. "요리 좀 할 줄 알아?"라는 물음에 나는 늘 "먹는 것은 자신 있는데 요리할 때 간을 못 맞춰요."라고 합리화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요리하는 것에 대해 '필수가 아닌 잘하면 좋은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볶음밥을 해줘도 아빠가 해주는 볶음밥 보다 엄마가 해주는 볶음밥이 더 맛있다고 한다. 볶음밥 맛 평가를 하는 아이들이 밉지 않다. 요리를 못하는 내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분발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어찌어찌 한 끼를 넘긴 것에 안도한다.
그런데 나에게 심판의 날이 왔다. 둘째 딸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간다며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공지를 받았다. 지금까지 아들, 딸 도시락을 아내가 준비했었는데 마침 아내가 야간 근무이기도 하고, 현재 나는 육아휴직인 상태이니 누가 봐도 내가 준비하는 것이 맞다. 집에 있는 '캐릭터 콩콩 도시락' 책을 얼른 1 회독했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레시피를 빠르게 확인 후 3가지를 선정했다. 딸에게 "내일 도시락 싸야 하는데 이거 3개 중에 골라주면 아빠가 만들어볼게", 아빠의 요리 실력을 눈치챈 딸은 3개 중에서도 가장 무난한 '하트 맛살 도시락'을 골랐다. 나도 내심 '하트 맛살 도시락'을 골라주길 바랐는데 역시 내 딸이다.
아내는 하트 맛살 도시락에 필요한 재료들을 주문한 뒤 출근했다. 당일 오전 하트 맛살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압박감에 06:15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05:30에 스스로 깼다. 30분도 걸리지 않을 도시락을 혼자서 1시간이 넘게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대파는 어슷 썰어요.'라는 설명이 있는데 살면서 '어슷 썰다'라는 말도 처음 들어봤다. 그렇게 겨우 자르고, 볶아서 '하트 맛살 도시락'을 완성했다. 야간 근무를 하고 온 아내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아내가 귀가하기 전까지 마무리해놓으려고 했으나 나의 미숙한 요리 실력에 결국 도시락 마무리는 아내 몫이었다.
"라온아 볶음밥 한입 먹어봐, 간 좀 봐줘, 먹을 만해?", 고개를 끄덕이며 "간식 싸지 말고, 이거만 싸줘", "라온아 하트 맛살 괜찮아? 아빠 합격이야?"라고 묻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끄덕인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운동도 아니고 독서도 아닌 주방에서 도시락을 싸봤다. 도시락을 싸고 남은 볶음밥은 아들이 마무리했다. 매일은 힘들더라도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분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