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 분리주의 비판
인디게임은 인디게임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도 존재했다. 마치 최근에 유행하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인디게임을 만드는 사람부터 플레이하는 사람들까지 '인디'라는 단어가 가진 모호함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렇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불명확성을 통해 오해와 논쟁을 이어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는 이런 불명확성으로 인한 모호함의 경계에서 철학적 비판을 통하여 느낌표를 던지고자 한다. 우선 기존 인디게임을 정의하던 형이하학적이고 절대적 기준을 버리고 형이상학적이고 상대적인 이념으로 정리하여 인식을 전환하고자 한다.
그럼 우리가 이제까지 인디게임을 규정하기 위해 선봉에 세웠던 단어들을 비판해 볼 시간이다. 그리고 '인디'가 가진 진짜 독립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시간이다.
“인디는 독립적인 개인의 원대하지만 미약한 선언일뿐이다.”
나는 인디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거대한 자본도, 화려한 조직도, 촘촘한 마케팅도 없이
겨우 자신의 이름 하나, 닉네임 하나 걸고 시작하는 조용한 선언.
그런데 요즘 인디 씬을 보다 보면, 이상한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누군가가 게임을 들고 나오면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건 인디가 아니야.”
“퍼블리셔 붙으면 인디 아닌 거 아냐?”
“저 정도 스케일이면 이미 AA지, 인디라고 하기엔 좀…”
마치 독립선언을 한 사람에게 “너는 진짜 독립국이 아니야”라고 도장을 찍어야만 인정해 주는 것 같다.
이 글은 그런 태도, 즉 ‘인디게임 분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먼저 짚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무엇이 인디인가?”라는 질문은 주체의 문제이지, 심판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독립선언은 처음엔 미약했다. 세상이 인정해 줘서 독립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선언이 가진 울림이 시간 속에서 공명하며 연대와 운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역사가 된다.
인디게임도 마찬가지다.
팀원 수가 적다고 인디인가?
예산이 작다고 인디인가?
퍼블리셔가 없으면 인디이고, 투자받으면 비(非) 인디인가?
이 기준들은 전부 바깥에서 들이대는 잣대다. 그리고 그 자를 들이대는 순간, 인디는 더 이상 “독립적 존재의 선언”이 아니라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입장 가능한 클럽”이 된다.
인디는 원래 문턱을 낮추는 언어였다.
“나도 할 수 있어.”
“우리도 만들 수 있어.”
라는 선언이었는데,
요즘의 인디 분리주의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너는 인디가 아니야.”
“그건 인디 레벨로 봐줄 수 없어.”
문을 열던 언어가 문을 닫는 언어로 변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인디가 아니다. 그저 또 다른 배타적 집단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독립된 인간이란 타인의 시선에서 독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의 시선”에는 인디 씬 내부의 시선도 포함된다.
인디 분리주의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메이저 플랫폼에 올라가면 인디가 아니다.”
“투자받고 나면 이미 영혼 판 거지.”
“유저를 너무 의식하는 순간 인디 정신은 죽는다.”
겉으로 보면 ‘순수성’을 지키자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속을 뜯어보면 사실상 “고립”을 미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립은 세상을 끊고, 타인을 끊고, 시장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은 고립이 아니라,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개인으로 자립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인디 개발자는 시장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시장과 이야기하기 위해 독립한다. 플랫폼과 자본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기중심을 갖기 위해 독립한다.
그 중심은 “아무와도 섞이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어디에 섞이더라도 내 방향성을 잃지 않겠다”는 결의에 가깝다.
일본 식민지배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때 “한국이 언젠가 꼭 독립할 거야”라고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현실 좀 봐라. 이건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다.” 라며 냉소하던 목소리가 더 컸을지 모른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은 “될 만한 싸움이니까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낮은 확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에 배팅하는 인간. 그가 진짜 독립된 인간이다.
인디게임 개발도 많이 닮아 있다.
이미 포화된 시장, 눈 높아진 유저, 줄어드는 플랫폼 지원. 어느 지표를 봐도 ‘될 만한 싸움’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환경에서 힘을 발휘하는 건
“너는 인디, 너는 아님”을 나누는 게이트키핑이 아니라, “우리는 이 환경에서도 만들겠다”라고 말하는 선언이다.
장르적으로 실험적인 게임을 내는 팀도
상업성과 실험성을 동시에 잡으려는 팀도
생존을 위해 외주와 병행하는 1인 개발자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게임, 나 아니면 누가 만들겠나”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만들어 나갈 때, 그 전체가 인디 씬의 생태계를 이룬다.
이때 중요한 건 출발점의 선언이지, 누군가 옆에서 들이대는 “인디 자격 심사표”가 아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잭 스패로우의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는다.
True enough, this compass does not point north.
사실 이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아.
“…Where does it point?”
“그럼 어디를 가리키죠?”
It points to the thing you want most in this world.
“이 세상에서 나침반 주인이 가장 원하는 것.”
인디 이념은 이 나침반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메타포다.
세상은 우리 손에 똑같은 나침반을 쥐여준다.
연봉과 직급이라는 북쪽
다운로드 수와 매출이라는 북쪽
메타크리틱 점수와 GOTY라는 북쪽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
그런데 인디 개발자는 몰래 자기만의 나침반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그 나침반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만들고 싶은가?”
인디 분리주의는 이 나침반을 “인증된 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고급 장비”로 만들어버린다.
돈을 벌면 더 이상 인디가 아니라고 말하며,
퍼블리셔와 손잡으면 독립성을 잃었다고 규정하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 “이제 우리 편 아님”이라고 밀어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자기 나침반을 따라가고 있느냐이다.
예산이 늘어도,
팀원이 많아져도,
플랫폼과 계약을 해도,
여전히 자기가 가장 만들고 싶은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건 여전히 인디 정신이다.
반대로, 아무도 안 도와주고, 돈도 못 벌고, 혼자 만든다고 해서 자동으로 인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그저 분노와 무력감만 곱씹는다면, 그건 안타깝게도 독립이라기보다 방황에 가깝다.
인디게임을 ‘분리된 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생태계’로 볼 것인가는 우리 태도에 달려 있다.
분리주의의 시선에서 인디는 이렇게 보인다.
메이저와는 섞이면 안 된다.
자본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
유저의 취향을 너무 의식하면 타락이다.
이런 태도는 결국 인디 씬을 점점 더 좁고, 척박하고, 고립된 섬으로 만든다.
반대로, 인디를 생태계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팀은 과감히 상업성과 타협해 생존을 모색한다.
어떤 팀은 아예 상업성을 포기하고 예술 실험에 몰입한다.
어떤 팀은 외주와 자신의 IP를 병행해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생태계는 건강해진다.
“너는 저기서 그렇게 버티고 있구나.
나는 여기서 이렇게 버텨볼게.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바다를 건너보자.”
인디의 힘은 순도가 아니라 스펙트럼에서 나온다. 진짜 인디, 가짜 인디로 나누는 순간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된다.
결국 인디게임 분리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독립을 ‘소속 없음’으로 오해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작업은 언제나 어떤 소속, 어떤 관계, 어떤 시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어디에 속해 있든, 나는 내 중심에서 출발해 선택한다.”
라는 태도다.
내면의 평화는 폭풍이 없는 날씨가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폭풍의 눈이다.
우리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원심력, 트렌드, 밈, 매출, 사람들의 평판, 시장의 압력 속에서도 끝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어떤 구심력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독립된 인간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다.
정리해 보자.
1. 인디는 타인이 판정하는 자격이 아니라, 스스로 던지는 원대하지만 미약한 선언이다.
2. 독립은 고립이 아니다. 공동체와 시장 속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지키는 능력이 독립이다.
3. 인디 분리주의는 문턱을 낮추어야 할 언어를 오히려 배타적인 인증 마크로 만들어버린다.
4. 진짜 중요한 것은 “인디냐 아니냐”가 아니라, 지금도 나 자신의 나침반을 따라가고 있느냐이다.
5, 인디 씬은 순도 높은 소수만의 클럽이 아니라, 다양한 생존 전략과 실험이 공존하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잭 스패로우의 나침반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 세상에서 나침반 주인이 가장 원하는 것.”
인디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각자가 자기 손에 쥔 그 나침반을 믿어보겠다는 선언이다.
그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
남들이 보기엔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비인기 장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낮은 확률이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배팅하는 인간. 그가 진짜 독립된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이제, “너는 인디, 너는 인디 아님”이라는 분리주의의 언어는 잠시 내려놓자.
대신 이렇게 묻자.
“당신의 나침반은 지금, 정말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향해 가리키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솔직하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