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3 캐즘을 건너는 빌더들에게
“지금 Web3는 어디쯤 와 있을까?”
강의장, 밋업, 디스코드 채널마다 나오는 질문이다. 버블은 이미 한 번 꺼졌고, 투기 열풍도 예전만 못하다. 한때 모든 걸 바꿀 것처럼 이야기되던 단어들 – 탈중앙화, 토큰 이코노미, DAO, NFT – 도 이제는 기자들의 헤드라인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모든 소음이 가라앉은 지금이 오히려 진짜 Web3가 시작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Web3는, 흔히 말하는 “캐즘(Chasm)”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과 기술의 확산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게 로저스의 ‘혁신 확산 이론’이다. 혁신가(Innovators),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s), 초기 다수(Early Majority)… 이런 곡선 위에 Web3를 얹어 보면, 우리는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Web3는 초기 기대와 버블은 지났고,
이제 초기 다수에게 가기 직전의 깊은 골짜기,
바로 그 캐즘을 건너는 중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명확하다.
소수의 혁신가들은 여전히 빌드 중이다.
투자는 줄었고, 성과는 더디다.
규제의 방향은 아직도 안개 속이다.
유저들은 흥미를 가졌지만, 굳이 써야 할 이유를 못 느낀다.
그래서 이 시기의 빌더들은, ‘성장’보다 ‘버티기’를 더 많이 이야기한다. 버티는 동안 손익계산서는 빨갛게 물들기 쉽고, 팀 내부에서는 “우리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반복해서 올라온다.
그래도 이들은 안다. 혁신이란, 항상 이런 불편한 구간을 통과한 뒤에야 “당연한 것”이 되어 세상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재미있는 점은, 대부분의 Web3 빌더들이 지금 Web2가 캐즘을 통과했던 ‘공식’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린 결국 유저 수와 리텐션으로 말해야 해.”
“온보딩을 줄이고, 전환 퍼널을 더 정교하게 보자.”
“커뮤니티 코어 유저를 만들고, 팬덤 구조를 설계하자.”
말만 Web3일뿐, 실제로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올라가는 KPI들은 Web2 서비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MAU, DAU, Retention, ARPU, LTV, CAC… 단지 장부에 적히는 단위가 ‘원화/달러’에서 ‘토큰’과 ‘NFT’로 한 칸 늘어났을 뿐이다.
이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이미 한 번 캐즘을 통과해 본 선배 플랫폼들”의 데이터를 참고하는 것은 합리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 있다.
Web3가 진짜로 만들어낼 변화는 Web2의 공식을 복붙 해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Web3가 다루는 재료는 분명히 다르다.
소유의 분산(Ownership)
인센티브의 토큰화(Token Incentive)
참여의 투명한 기록(Immutable Record)
이제는 여기에 AI라는 새로운 변수까지 얹혔다.
즉, Web3 빌더들에게 남은 과제는 “Web2의 공식을 얼마나 잘 따라 하느냐”가 아니라, “전혀 다른 재료로 새로운 공식을 설계할 수 있느냐”다.
현재 Web3에서 눈에 띄게 움직이는 축은 크게 네 가지다.
1. 금융(Finance)
디파이(DeFi), 온체인 파생상품, 스테이블코인, RWA(실물자산 토큰화)…
Web3는 금융의 경계를 가장 먼저 흔들었고, 지금도 가장 치열한 실험이 이 영역에서 벌어진다.
2. 커뮤니티(Community)
디스코드, 텔레그램, 온체인 거버넌스, DAO, 팬덤,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단순한 유저 모임이 아니라, 지분과 발언권을 가진 공동체로 커뮤니티가 재정의되는 중이다.
3. 게임(Game)
P2E의 과열과 붕괴를 지나, 이제는 조금 더 현실적인 모델을 찾는 국면이다.
단순한 “돈 버는 게임”이 아니라, 재밌는 게임 위에 자산과 커뮤니티가 얹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4. AI(인공지능)
Web3와 AI의 결합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실험이 시작된 영역이다.
AI 에이전트가 지갑을 운영하고, 게임 내 NPC가 온체인 자산을 관리하며, 유저의 플레이 패턴과 기여도를 분석해 맞춤형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네 가지 축은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 서비스 안에서 동시에 뒤엉키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게임 속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면 토큰과 NFT를 얻고,
그 자산을 디파이 프로토콜에 예치해 추가 수익을 얻으며,
같은 길드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 전략을 나누고,
AI가 개인에게 최적화된 빌드/플레이/투자 스타일을 추천해 준다.
이 모든 경험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앱, 하나의 경험 안에 녹아드는 순간, 우리는 그걸 이렇게 부를 것이다.
“아, 이게 Web3 시대의 슈퍼앱이구나.”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지갑, 거래소, 소셜 네트워크, 메신저, 게임 플랫폼… 각자가 자기를 “슈퍼앱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며, 유저의 시간을 붙잡기 위해 경쟁 중이다.
그런데 이 경쟁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하지만 가장 확신에 가까운 문장이 하나 있다.
“매스 어답션(Mass Adoption)은 결국 게임이 만든다.”
이건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역사가 충분히 증명해 준 이야기다.
스마트폰 보급의 기울기를 키운 건, 결국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앱이었다.
결제 시스템과 인게임 구매에 익숙해지게 만든 것도, 카드 결제나 송금 앱이 아니라 게임 내 아이템 결제였다.
스트리밍 시대에 사람들을 구독 경제에 익숙하게 만든 것도, 먼저는 음악·영상, 그리고 그 안에서 즐기는 게임과 디지털 굿즈였다.
게임이 가진 힘은 단순하다.
1. 온보딩의 마법
“지갑 생성”은 어렵게 느껴지지만, “튜토리얼 퀘스트 클리어하고 보상받기”는 쉽다.
같은 행동이라도 게임 안에 넣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시도한다.
2. 경제 실험의 속도
경제 시스템을 바꾸고, 패치를 하고, 이벤트를 돌려 보고, 그 결과를 빠르게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게임만큼 적다.
인플레이션, 보상 설계, 세컨더리 마켓 구조를 현실보다 훨씬 빠른 사이클로 실험할 수 있다.
3, 감정으로 묶인 커뮤니티
게임은 유저들에게 “같이 버틴 시간”을 선물한다.
보스를 함께 잡고, 길드를 같이 운영하고, 패배와 승리를 반복하면서 그냥 채팅방으로는 만들 수 없는 유대감이 쌓인다.
Web3 슈퍼앱의 중심에 게임이 서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갑도, 토큰도, NFT도, 거버넌스도, 모두 결국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에 의해 사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을 가장 적극적으로 설계하는 장르가 바로 게임이다.
그렇다면, 만약 Web3가 정말로 게임을 통해 매스 어답션을 이뤄낸 뒤에는 어떤 질문이 남을까?
아마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묻게 될 것이다.
이 게임은 유저의 시간을 진짜로 존중했는가?
토큰과 NFT는 단지 ‘차익 실현 도구’가 아니라, 유저의 기여와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가 되었는가?
이 커뮤니티는 거버넌스를 통해 더 나은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는가?
AI는 플레이어를 착취하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유저의 경험을 확장시키는 파트너로 작동했는가?
캐즘을 건넌 뒤에 진짜 평가받는 건, 숫자나 차트가 아니라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는 아마도 이미 시장의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빌더, 크리에이터, 게이머, 투자자들이 있을 것이다.
토큰 가격이 아니라 코어 유저 100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획을 다시 짜는 사람들
“이벤트 좀 세게 때려서 유저 땡기자” 대신, “이 구조가 장기적으로 유저에게도, 우리에게도 건강한가?”를 고민하는 사람들
“이번 사이클 한 번 태워서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지금 Web3의 어둡고 긴 캐즘을 몸으로 통과하는 혁신가들이다.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이 길이 쉽지 않고, 지금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다는 걸. 그러나 또 모두 알고 있다.
매스 어답션은 결국 게임이 만든다.
지금 이 문장을 진심으로 믿고, 현실적인 재미와 지속 가능한 경제를 동시에 설계하려 애쓰는 팀들.
아마도 캐즘 건너편에서 살아남아 서 있는 이름들은 그런 팀들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이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긴 게 아니라, 게임다운 게임을 만들며 끝까지 안 죽고 버텼을 뿐이라고.”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냥 계속 만든다. 게임을, 커뮤니티를, 그리고 새로운 Web3의 공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