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적 인간이 탄생하는 모래사장

자기 삶을 놀이로 바꾸는 ‘초인(Übermensch)’

by JuPD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메타버스에 물음표를 던진다.
“이미 망한 거 아니야?”, “그거 그냥 게임 아냐?”, “VR 기기부터 안 쓰는데 무슨 메타버스야.”


이런 반응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메타버스를 너무 기술로만 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어쩌면 메타버스를 다시 바라봐야 할 시점은, 하드웨어가 보급되는 순간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변신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변신을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의 세 단계 — 낙타, 사자, 어린아이 — 에 겹쳐서 보고 싶다. 그리고 이 세 단계의 마지막, ‘어린아이의 단계’에서야 비로소 메타버스가 제자리를 찾게 될 거라고 믿는다.



1. 낙타의 시대: 산업화가 만든 ‘의무의 인간’


니체에게서 낙타는 ‘짐을 짊어지는 존재’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명령,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정신의 상태다.


우리가 지나온 근현대의 대부분은 이 낙타의 시대였다. 산업화를 거치며 만들어진 ‘좋은 노동자’의 이미지가 그랬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주어진 업무를 묵묵히 처리하고

회사와 가족을 위해 감정을 숨기고

“이 정도면 됐지”라는 위로로 스스로를 달래는 삶


여기서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의무가 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사람처럼 취급되는 구조. 쉬고 있으면 죄책감이 따라붙는 문화.


낙타의 시대에 인간의 어깨 위에는 ‘근면 성실’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멍에가 얹혀 있었다. 이 멍에는 우리가 원해서 짊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라며 습관과 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세습된 것이었다.



2. 사자의 시대: 자본의 카르텔에 저항하는 정신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분명 다른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니체가 말한 두 번째 단계, 사자의 단계다.


사자는 더 이상 ‘의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자는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맞서 “나는 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 MZ 세대의 퇴사 열풍, 워라밸, ‘평생직장’ 신화의 붕괴, 과로사와 번아웃에 대한 집단적인 거부, 플랫폼 노동에 대한 비판, 자본의 카르텔에 대한 의심, 이 모든 움직임은 낙타의 시대에 쌓인 피로와 모순에 대한, 사자의 저항처럼 보인다.


사자의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어떻게 하면 더 잘 견딜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방향이 바뀐다.

“이 구조 자체가 맞는 걸까?”

“왜 노동의 대가와 삶의 질은 이렇게 따로 놀까?”

“왜 누군가는 시스템만 소유하고, 누군가는 평생 노동만 제공해야 할까?”


이 질문들은 아직 완전한 대안을 만들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부정의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자의 단계에는 한계도 있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세계를 직접 “놀이하듯” 만들어내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사자 다음에는 어린아이가 와야 한다고.



3. 어린아이의 시대: 모래성을 부수며 웃을 수 있는 인간


니체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
‘어린아이의 단계’는 많은 오해를 낳는다.


어린아이라고 하면 미성숙함, 철없음, 책임감 없음이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은 전혀 다르다.


어린아이는 광활한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는다. 힘들게, 정성스럽게, 집중해서 쌓는다. 그리고는 그 모래성을 스스로 부숴버리고 다시 짓는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묻는다. “아니, 왜 힘들게 쌓아놓고 부숴?” 그런데 아이는 대답한다. “그게 그냥 재밌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목적이 결과가 아니라 ‘놀이’에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점수나 평가를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효율이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아이의 삶은 충만해진다.

나는 메타버스 시대의 핵심이 바로 이 어린아이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4. 메타버스는 ‘일’의 연장이 아니라, ‘놀이’의 회복이어야 한다


우리가 메타버스를 이야기할 때, 최악의 접근은 이것이다.


“메타버스를 통해 어떻게 더 일을 잘 시킬 수 있지?”
“메타버스에서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메타버스를 이용하면 노동 효율이 얼마나 오르지?”


이 질문은 여전히 낙타와 사자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질문이다. 낙타의 언어로 메타버스를 이해하고, 사자의 욕망으로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방식.


하지만 메타버스가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질문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더 잘 놀 수 있지?”
“실패와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려면 어떤 규칙과 환경을 설계해야 하지?”
“각자 다른 정체성과 취향이, 서로를 얽매지 않고 공존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메타버스가 단순한 가상 오피스, 또 하나의 쇼핑몰, 또 다른 광고 플랫폼으로만 소비된다면, 그건 그저 현실 자본주의의 복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메타버스가 그런 곳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실패해도 괜찮고

다시 시도하는 데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참여자들이 함께 놀이 규칙을 수정해갈 수 있는 공간


이런 공간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낙타의 의무감과 사자의 분노를 내려놓고, 유희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5. ‘초인’은 거창한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삶을 놀이로 바꾸는 사람들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종종 오해된다.
초능력을 가진 영웅, 엘리트, 선택받은 소수의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초인은 이런 사람들이다.


남이 정해준 인생 루트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규칙, 자기만의 속도를 설계하며

그 속에서 삶을 하나의 거대한 창작 놀이처럼 대하는 사람


메타버스는 이 초인을 위한 실험실이 될 수 있다.

하나의 현실에서 단 한 번의 인생만 허용되던 시대에서, 여러 정체성, 여러 세계, 여러 시도를 병렬적으로 수행해 볼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직업이 아닌 취향 중심의 정체성을 실험하고

평가 대신 공감과 공유를 기반으로 관계를 맺으며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실패를 ‘다음 판’으로 연결하는 경험치로 다루게 된다.


나는 이런 존재들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실존적 이상, 즉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6. 나는 니체의 이상이 메타버스에서 실현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낙타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분명히 사자의 시대다.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저항, 노동의 관습에 대한 부정, 카르텔에 대한 의심, 이 모든 것들은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부정만 하는 사자”로 남을 것이다. 무언가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새로운 세계는 설계하지 못한 채로.


그래서 나는 메타버스를,


‘어린아이의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거대한 놀이터로 보고 싶다.


광활한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부수고, 다시 쌓으며 웃는 아이처럼, 우리도 여기서 일과 놀이의 경계, 노동과 창작의 경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을 오랫동안 짓눌러온 “삶의 관성이 만든 멍에의 중력”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들은 어쩌면 먼 미래의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자기 삶을 놀이처럼 창조하는 우리 자신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브라우저를 열고, 혹은 헤드셋을 쓰고 들어간 그 세계가 단지 ‘또 하나의 플랫폼’이 아니라, 진짜로 "유희적 인간이 탄생하는 모래사장"이 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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