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감각’이 마비된 시대

‘헝그리정신’은 어디로 갔나

by JuPD

21세기, 이제 아무도 ‘헝그리정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단어는 어딘가 촌스럽고, 폭력적이고, 낡아 보인다. “아직도 그걸 말해?”라는 표정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배고프다. 무언가가 늘 부족하고, 늘 초조하고, 늘 뒤처진 느낌을 안고 산다. 다만 예전의 배고픔과 다르다. 예전의 배고픔은 달리게 했지만, 지금의 배고픔은 눕게 만든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감정이 ‘배고픔’이라기보다 ‘고달픔’, 더 정확히 말하면 ‘탈진’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묻고 싶다.


헝그리정신은 죽었나? 아니면,
헝그리정신이 숨 쉬기 어려운 환경이 된 걸까?



1. 결핍은 사람을 벼린다. 단, ‘진짜 결핍’ 일 때만.


나는 ‘결핍’ 없는 혁명을 본 적이 없다. 결핍은 한 인간을 송곳처럼 벼려낸다. 육체의 배고픔이든, 정신의 배고픔이든, 결핍은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다”는 신호이고, 그 신호는 방향을 만든다.


하지만 결핍이 추진력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1) 무엇이 결핍인지 자각할 수 있어야 하고

2) 그 결핍을 채우는 경로가 현실에 존재해야 하며

3) 그 과정의 피드백이 내 삶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결핍은 성장의 엔진이 된다. 결핍은 콤플렉스를 만들고, 콤플렉스는 반동을 만들고, 반동은 행동을 만든다. 그렇게 사람은 앞으로 나간다.


문제는 지금이 그 반대의 시대라는 점이다.



2. ‘결핍의 결핍’이 일상화된 시대


요즘 사람들은 결핍이 없다기보다, 결핍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약해진 것 같다. 정확히는 “결핍이 무엇인지 말할 언어”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너무 쉽게 배부르다. 정말로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배부른 척을 하도록 설계된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매일 우리를 배고프게 한다. 더 좋은 몸, 더 좋은 집, 더 좋은 연인, 더 좋은 삶. 남의 하이라이트가 내 일상의 자존심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동시에, 그 배고픔을 즉시 달래는 ‘가짜 포만감’도 같이 판다.


짧은 영상, 자극적인 기사, 분노 버튼, 비교 버튼, 혐오 버튼. 영양가 없는 것들이 배를 채운다. 곤약처럼. 씹는 느낌은 있는데, 살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건 꽤 효율적이다. 가짜 포만감은 빠르게 들어오고, 빠르게 꺼진다. 꺼질 때는 강한 금단이 온다. 금단이 오면 우리는 다시 찾는다. 이 반복은 아주 훌륭한 소비 루프를 만든다.


결국 우리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배고픔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게 ‘결핍의 결핍’이 영혼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3. 탈진의 시대에 “더 헝그리 해져라”는 말이 폭력이 되는 이유


사실 헝그리정신은 종종 오해받는다. 그건 “가난을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고, “몸을 갈아 넣자”는 구호도 아니다. 진짜 의미는 더 미묘하다.


헝그리정신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감각에 가깝다. 그리고 그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탈진한 사람에게 “더 원해봐”라고 말하는 건 잔인할 수 있다. 이미 에너지가 바닥인데, 욕망을 더 끌어올리라고 하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 방전이다.


그래서 시대는 ‘헝그리정신’을 버린 게 아니라, ‘헝그리’라는 단어를 현실과 맞지 않는 구호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필요한 건 “더 배고파져라”가 아니라, “내 배고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감각하자”다.



4. 무지의 지가 아니라, ‘허기의 지’가 필요한 시대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무지의 지’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게 지혜의 시작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형태일지 모른다.


‘허기의 지’ — 내가 무엇에 배고픈지 모른다는 걸 아는 능력.


이 능력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고픔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규정이 되고

규정은 정당화가 된다


상대방을 한 줄로 정의하면 편하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그 순간 내 행동은 자동으로 정당해진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이보다 쉬운 도구가 없다.


그러나 그 정당화는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배고픔의 정체를 더 흐리게 만든다. 가짜 포만감으로 채운 배는 잠깐 부르지만, 결국 더 큰 금단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더 지치고, 더 분열되고, 더 탈진한다.



5. 개와 늑대: 자본주의는 ‘내 결핍을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굴이 바뀐다


나는 자본주의를 한 단어로 규정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때로는 내 삶의 도구이고, 때로는 내 영혼의 포식자다.


여기서 차이는 무엇일까?


내 결핍을 내가 해석하느냐, 아니면 해석권을 빼앗기느냐.


내 결핍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자본주의는 ‘개’가 된다. 길들여서 부릴 수 있다. 돈은 도구가 되고, 시스템은 발판이 된다. 나는 훈련자가 된다.


하지만 내 결핍을 피하면, 자본주의는 ‘늑대’가 된다. 불안과 허기를 먹이로 삼아 나를 쫓는다. 나는 소비로 진정제를 먹고, 더 큰 공허로 깨어난다. 나는 도망자가 된다.


자본주의가 선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배고픔을 ‘정의’하는 순간, 힘의 균형이 바뀌기 때문이다.



6. 그럼 ‘허기의 지’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장치가 필요하다. 내 배고픔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감각은 훈련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런 질문들을 추천하고 싶다.


1) 이걸 하고 나면 에너지가 남는가, 사라지는가? 남으면 진짜 밥일 확률이 높고, 사라지면 가짜 포만감일 확률이 높다.

2) 이걸 못 하면 불편한가, 불안한가, 공허한가? 불안/공허가 크면 ‘욕구’가 아니라 ‘의존’ 일 수 있다.

3) 이 선택은 내일의 나를 조금이라도 강화시키는가? 아주 작은 기술, 아주 작은 체력, 아주 작은 용기라도 남기면 진짜에 가깝다.

4) 나는 지금 무엇을 피하려고 이 행동을 하는가? 피하는 감정이 크면, 그 감정이 ‘진짜 결핍’의 입구일 수 있다.

5) 내가 원하는 것은 ‘인정’인가, ‘성장’인가? 인정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인정만 남으면 쉽게 탈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문장 하나.


“내가 정말 배고픈 건 무엇이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무섭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다른 걸 먹는다. 하지만 이 질문을 피하는 한, 우리는 계속 배부른 척한 채 굶게 된다.



7. 헝그리정신은 죽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바꿔야 한다.


헝그리정신은 ‘더 갈아 넣는’ 정신이 아니라 ‘내 결핍을 끝까지 바라보는’ 정신이어야 한다. 탈진의 시대에 필요한 헝그리는 폭주가 아니라 감별이다.


가짜 포만감을 거절할 용기

내 허기를 말로 붙잡는 언어

남의 하이라이트가 아닌 내 하루의 피드백

규정으로 도망치지 않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결핍의 해석권을 되찾는 일


우리는 배부른 시대가 아니라, 배부르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진짜 혁명은 더 많은 것을 먹는 게 아니라,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헝그리정신은 죽어버린 시대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헝그리정신이 ‘허기의 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시대다.


그리고 그 순간, 자본주의는 늑대가 아니라 개가 된다. 내가 주인이 되는 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