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슬라이드

by 이승훈 Hoon Lee


과거 BCG 어쏘 1년 차 시절, 제안서를 열심히 쓰던 과정에서, 당시 이사님이 내가 급하게 만든 슬라이드 1장을 보며 '오.. 이건 CEO 슬라이드네? 잘했네'라 칭찬을 해 주신적이 있었다.


논의된 내용들을 급하게 만들었어야 했었어서 1) 큰 구분만 Conceptual 하게 하고 2) 필요한 내용만 키워드로 박아 넣었었는데, 당시에는 왜 해당 슬라이드가 CEO 슬라이드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운이 좋았나보다. 100장 만들면 CEO 슬라이드가 1장 나오나?' 정도 생각하고 넘겼던 듯하다.


사실 주니어 1~2년 차 때에는 슬라이드 그리기 재미에 푹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1) 뭔가 있어 보이는 그래프를 담은 슬라이드 뽑아내기 (모 회사에서는 라자냐 그래프, 모 회사에서는 마리메꼬 그래프라 불리는..), 2) 열심히 조사한 내용을 나름 멋진 도표에 꾹꾹 담아서 만든 장표 만들기, 3) 정성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숫자화해서 뭔가 있어 보이게 표현하기 등등에 심취해있었다. 그런데, '있어 보이는데?' 라고 생각해서 가져간 슬라이드에 대해서는, '너무 busy 하다. 핵심만 보여줘라' 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는데, 내용을 덜어낼 때마다 '하... 이거 만드느라 어제 밤 샜는데, 이걸 어찌 덜어내..' 하며 고뇌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보고의 본질, 그리고 경영자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보고는 의사결정권자의 기억에 딱 1~2개 메세지를 강하게 꽂아 박는 시간이고, 그래서 보고는 의사결정권자가 핵심 1~2개 페이지를 찢어서 속 주머니에 넣어가면 성공이고, 의사결정권자는 많은 정보/입체적 분석 보다는, 그래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수가 명확히 담긴 conceptual 하지만 방향성이 보이는 장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 팀 분들께 유저께 보내는 CRM 메세지 및 이메일 관련해서, '제목이 가장 중요하다' '맨 위 메세지에 정수를 담아야 하는데, 이에 많은 고민/시간을 들여야 한다'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메세지/장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열심히 조사했고 입체적으로 분석을 돌렸는지를 보여주는 콘테스트가 아니다. 상대방이 꼭 들어야 하는 내용에 대해, 기억에 남을 만한 메세지를 기억에 선명이 남을 정도로 직관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이 본질을 빠르게 이해하면 할수록, 일을 효과적/효율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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