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전의 마음>
과학자가 쓴 글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있나? 도쿄대 출신으로 홋카이도에서 평생 눈을 연구한 물리학자 나카야 우키치로의 산문집 <과학 이전의 마음>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다. 1900년대 초반에 일본의 시골에서 태어난 나카야 우키치로는 생물학자가 되려다 물리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눈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고.
과학에 관한 책이지만 딱딱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연구대상이 자연 그 자체, 즉 ‘눈’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문장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특히 어린 시절 친구들과 바다에 잠수했던 이야기는 어지간한 작법서 ‘묘사’ 챕터의 예시로 사용해도 될 정도이다. 특히 눈 결정을 설명하는 부분은 문학작품의 한 대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눈의 결정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본 사진 중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또한 나뭇가지 끝에 걸쳐져 있는 눈 결정은 마치 이제 막 피려고 하는 장미 봉오리처럼 선명한 윤곽을 지닌다.”와 같이.
이처럼 평소 선호하지 않는 과학 분야의 책임에도 아름답고 절제된 문장을 거친 이야기들은 어지간한 소설책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전근대에서 근대국가로 변모한, 더 나아가 제국주의를 거쳐 세계 4대 강국으로까지 번창했던, 그러다 패전 이후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던 일본의 시대상, 그 과정에서 일본 과학계의 변화, 지금은 사라진 일본의 소소한 전통 풍습 등이 눈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 쥐의 온천 치료, 천황과의 이벤트, 홋카이도의 기근, 농민의 온천문화와 같이 재미있는 소재들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다. 특히 전후 천황의 지위 변화는 대략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인물의 입을 통해 듣는 느낌이 또 달라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또한 글에서 오롯이 느껴지는 저자가 가진 ‘과학자의 마음’에 진부한 말이지만 감동을 받았다. 전쟁이라든가 이념이라든가 정치라든가에 관계없이 과학과 연구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에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새삼스럽게 말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적대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세계 최초로 인공눈을 만들어낸 그의 연구 성과 및 그가 참여한 눈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가 미국에 소개되기도 했다고.
그는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을 구분하고 보다 실용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렇다고 흔히들 ‘비과학적’이라 일컫는 것을 미개하거나 무지한 것으로 치부하는 대신, 그것을 ‘과학 이전의 마음’이라 설명한다. 과학자답게 냉철하면서도 내면 깊이 따뜻함이 느껴졌던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인 것의 예시로 등장하는 일본인의 사고방식, 조직문화 등은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은 한국사회를 떠올리게 해서 시사점이 많다.
“조직 면에서도 일본인은 약한 것 같다. ‘커다란 집단 속에 들어가 조직의 일환이 되어 조직이 하나의 전체로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일’.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런 일을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 증거로 일본인은 조직 밖에서는 반항하고 조직에 들어가면 맹종하는 경향이 자주 관찰된다. (....) 과학의 경우는 조직 안에 들어가서도 주어진 범위 내에서 창의성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일본인에게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읽다보면 당시 우리나라는 거의 전국민이 굶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저런 고급 연구를 하고 그와 관련된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물론 제국주의를 통해 다른 나라를 억압한 결과물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아무튼 연구의 내용이나 방식, 저자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철학 등이 1930-50년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세련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물리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 것인가 (단순히 조리있고 정보전달을 잘하는 차원을 넘어서 문재가 느껴지는 문학적인 글)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드는데, 본래 고등학생 때 생물학과 가려고 3년간 생물학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대입 직전에 물리에 관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물리학 서적 빌려서 2주동안(....) 공부해서 도쿄대(....) 물리학과 갔다는 거 보면 그냥 원래 처음부터 천재인 걸로.....심지어 천재들 특유의 기만까지 여지없이 실천한다. “나는 실험물리 쪽이 성격이 맞는다. 이론물리를 하려면 상당히 머리가 좋아야 하고 한곳을 파는 성질이나 추진력도 강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다.” (......)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훌륭한, 간만에 독서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 준 정말로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이다. 굳이 흠을 꼽자면 편집이 아쉽다는 점. 여기 저기 편집에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는데, 아름답긴 하지만 책을 읽는데는 상당히 방해가 된다는 것이 함정이다. 예를 들면 문단이 바뀌는 부분마다 문단을 바꾸는 대신 공백을 크게 띄우고 눈 결정을 그려넣는다든가, 중간의 한 챕터는 페이지를 상하단으로 나누어 왼쪽은 상단만 오른쪽은 하단만 사용한다든가. 글이 중간에 끊기는 느낌이라 매우, 대단히, 상당히 거슬린다. 편집자 각주를 파란 글씨로 바로 바로 읽을 수 있게 덧붙여준 점은 좋았다. 매우 매우 강력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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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대 분위기라는 게 참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 시대는 경찰부장이 천황을 안내하는데 예정과 다른 통로로 잘못 안내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거나 학교 건물에 불이 나면 학교 교장이 천황사진을 가지러 불속으로 뛰어들어 가는 게 당연했던 그런 시대였다. (1936년) 이런 도가 지나친 사고들이 빈번히 발생하자 궁에서 오히려 이런 일들을 그만두라는 지시까지 내릴 지경이었지만 어리석은 여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천황의 지시에 반대하는 입장이 될지언정 이른바 충군애국이라는 허상이 온 나라를 지배했던 악몽의 시대였다. -p.34, <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
사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불경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이라는 명령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실험에 실패하지 않도록’이라는 명령은 서로 합이 들어맞지 않는 명령이다. 한마디로 모순된 명령이다. -p.39, <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
그즈음 어쩌다 영국잡지 <네이처>가 나의 눈 연구를 4면에 걸쳐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그게 기회가 되어 미국 ‘사이언스 서비스’가 미국 내에 ‘인공눈’을 크게 소개해 주었다. 라디오에서까지 방송해 주었다고 한다. 1938년 말부터 1939년 정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1939년이라고 하면 중일전쟁이 점점 확대되어 그해 7월에는 미일통상조약 폐기 통고가 있었을 정도로 미국과 일본 양 정부 간의 기류가 매우 험악했던 시기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이 연결된 세상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 p.48, <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
언뜻 보면 상당히 한가롭고 느긋한 연구처럼 보이겠지만 매일 그 많은 쥐에게 식이요법을 시키고 시간을 정해 온천에 입수시키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실험으로 일단 알게 된 사실은 쥐가 온천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쥐를 철망 바구니에 넣은 채로 온천에 넣는데 온천탕의 온도가 딱 좋은 온도가 되면 쥐들이 굉장히 편안한 표정으로 철망을 잡고 고개만 밖으로 내놓은 채 조용히 온천을 즐기더라는 이야기였다. 그중에는 그대로 낮잠을 자다가 손을 놓쳐 탕 안으로 빠져서 놀라 허우적대는 놈도 있었다고 한다.
상처 치료 속도도 상당히 빨라졌다. 처음에는 온천탕 온도가 너무 높아서 쥐가 괴로워하기도 했고 그럴 때는 치료 속도가 오히려 더 느려졌다. 그래서 어떤 그룹은 온도를 다양하게 바꾼 탕에 넣고 다른 그룹은 입욕 시간과 빈도수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보는 식으로 많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식으로 온천욕을 시켰다. -p.74-75, <쥐의 온천치료>
과학 이전의 사고방식을 정리한다는 것은 옛 사고방식을 박멸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랜 전통이 있고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는 일종의 계급사회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침투해 있는 사고방식을 빠른 시일에 박멸하려 한다면 반드시 무리하게 되어 있다. 과학은 무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리’라는 것은 어떤 것에 반대하거나 어떤 무리도 동반하지 않는다. 정리라는 의미는 과학 이전의 사고방식을 ‘과학 이전’이라고 인정하고 그대로 둔다는 뜻이다. 제대로 인정하기만 해도 그것은 그다지 해를 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인정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만 일단 모두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만 해도 의외로 쉬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p.120-121, <과학 이전의 마음>
나는 “전기 지식 따위를 종이인형극으로 보여 주기에는 종이인형극이란 형식이 좀 아깝습니다. 그것보다는 손오공 같은 걸 하는 게 어떻습니까? 물론 당장은 그게 과학 보급이라는 목적과는 좀 동떨어져 보일지 모르겠지만 장래 일본 과학을 위해서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아무래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형극을 보면서 손오공에 푹 빠져서 여의봉이나 파초선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본 아이는 원시의 모습도 현대의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되는 법인데 말이다. -p.154-155, <비녀를 꽂은 뱀>
그때 우리 학교는 대회에서 졌을 때 주장이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에 나오는 풍습이 있었다. 심지어 주장들 중에는 일부러 1년 낙제를 해서 졸업을 늦추고는 다음 해 필승을 기원하는 학생도 종종 있었다. 당시는 그런 것을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꿈같은 이야기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런 비합리적인 생각이 허락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때 일본의 국력이 강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p.252-253, <나의 이력서>
조직과 협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인은 유감스럽지만 아직 조직과 협력을 위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다. 개개인으로 보면 멋진 연구자라도 3000명이나 모아 놓으면 더 이상 그 힘을 종합적으로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원인은 의외로 저급한 곳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대부분 ‘누구 밑에서 일하는가’, ‘조수 일을 시켰다’ 같은 사사로운 분쟁과 불평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모두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고 싶어해서 그렇다. -p.333, <뭔가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것>
조직 면에서도 일본인은 약한 것 같다. ‘커다란 집단 속에 들어가 조직의 일환이 되어 조직이 하나의 전체로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일’.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런 일을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 증거로 일본인은 조직 밖에서는 반항하고 조직에 들어가면 맹종하는 경향이 자주 관찰된다. (....) 과학의 경우는 조직 안에 들어가서도 주어진 범위 내에서 창의성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일본인에게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p.333-334, <뭔가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것>
서양 사람들은 일본인이 모방만 한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모방을 전혀 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창성은 있을 수 없다. 조금 강조해서 말하면 전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정교하게 모방한다는 것은 독창성이 높다는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p.335, <뭔가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것>
현대 과학 문명은 과학과 기술의 융합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융합은 고도의 협력이 요구된다. 그 협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독창성이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게 과학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력의 측면이 결여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협력 개념이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협력이라고 하면 뭔가를 사이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것은 부산물 같은 것이지 목적은 아니다.
일본에서 ‘저 남자는 협력을 잘 한다’라고 말하면 ‘사실 속으로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동의를 한다, 혹은 동의를 한 듯한 얼굴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가벼운 맹종이나 겉으로만 사탕발림하는 협력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협력이라는 단어와 전혀 다른 의미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단어를 함께 쓰고 있으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p.335-336, <뭔가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것>
그렇다면 ‘과학은 협력이다’라고 할 때 협력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개개인이 완전한 톱니바퀴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전한’이라는 단어로 단지 그냥 톱니바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교한 기계 속 톱니바퀴는 하중이 너무 세게 걸리면 망가진다. 회전 속도가 너무 빨라도 망가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조정되어 있다면 완전한 기능을 발휘한다. 따라서 협력하는 조직 속에서 일하는 연구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에는 반대하고 무리한 이야기는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협력의 한 요소다. 물론 거부해야 하는 조건이 없다면 완전히 기능을 발휘하면 될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반대하는 것도 협력의 요소일 수 있음을 일본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p.335-336, <뭔가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것>
영어로는 앞선 질문이 긍정형이거나 부정형이거나 상관없이 똑같이 음악회에 간 경우에는 예스, 가지 않은 경우에는 노다. 하지만 일본어로는 부정형으로 물을 때는 부정형 질문에 맞추어 ‘네’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에 따라 내 머리를 작동시키는 셈이다.
이 문답 형식의 차이를 잘 생각해 보면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다.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질문이나 대답이 정보 교환이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갔다’라는 사실이 없는 경우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노’라는 대답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질문이 ‘갔었나?’ 같은 형식이든 ‘가지 않았나?’ 같은 형식이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본어에서는 ‘갔었나?’로 물어보면 ‘아니오’, ‘가지 않았나?’로 물어보면 ‘네’가 된다. 상대방 의향에 따라 대답하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초에는 이런 사고방식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 같다. 단순한 정보 교환으로 끝날 문제에 대해 무의미하게 일일이 상대방 의향을 신경 쓴다면 정신력 낭비가 심해질 것이다. -p.363, <기계의 사랑>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신적인 나태가 원인이다.
이 정신적 나태가 인간의 능률을 방해하는 최대 원인이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나 생활의 합리화 같은 것은 ‘이 정신적 나태를 없앤다’는 이야기다. 이에 관해 친구가 멋들어지게 든 예시가 하나 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자명종 시계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수리할 수 있는 주부보다는 바로 시계방에 수리를 맡기러 갈 수 있는 주부가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 그럼 대체 이 정신적 나태는 어디에서 오는가. 일단 가장 큰 원인은 두뇌의 피로에서 기인한다. 나는 이 피로는 불필요한 것에 정신력을 쓸데없이 많이 쏟았을 때 생긴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경우 예스 혹은 노로 정리할 수 있는 일을 불필요한 정신력까지 다 쥐어짜서 사용하는 바람에 중요한 정신력을 마구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시시한 일이다.
과학이 생활 속에서 가장 도움이 많이 되는 순간은 이런 식으로 사고방식을 정리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한다.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