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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16. 2019

우리에게는 고국이 없다

<파친코>를 읽고

후쿠오카에서 재즈바에 갔을 때 주인 아저씨가 물었었다.

“마작 할 줄 알아? 마작? 마작 한국에도 있지?”
“음, 한국에서는 마작 대신 포커나 고스톱을 치는데요, 몰래 몰래 재미로만 쳐요.”
“몰래 친다고? 어째서?”
“한국에서는 도박이 불법이거든요. 카지노는 외국인만 들어갈 수 있고, 포커나 고스톱 같은 건 금지예요. 소소하게 친구들이랑 노는 건 괜찮지만 돈 걸고 하는건 안돼요.”
“그럼 아예 안해?”
“뭐, 금지된 걸 몰래 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잖아요. 마약이든 도박이든. 그러다 경찰 단속에 걸려서 감옥 가고. 그러고보니 파친코도 없어요.”
“이야, 파친코도 못하게 한다고? 도박이 아예 불법이라니 대단하네. 한국사람들은 국민성이 성실한가봐. 우등생 같아! 잠깐, 근데 일본 파친코 주인들은 전부 재일교포들인데 어떻게 된거야!!!”

그때 우리는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 웃었었다. 일본 파친코계의 큰손들이 죄다 재일교포라는 이야기는 사실 이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대개 부자이거나 가난하다고. 중간은 없다고. 그리고 부자들은 대부분 파친코 산업 종사자라고.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녀는 대학시절 재일 조선인을 일컫는 ‘자이니치’라는 용어의 유래를 듣고 한동안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차별당하는 조선인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그녀는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쓰다가 후에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이 도쿄로 발령을 받자 본격적으로 <파친코>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파친코>는 완성하기까지 무려 30년이 걸린 대하소설이다. 대하소설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좀 짧을 감이 있지만,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삶이 4대에 걸쳐 그려지므로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소설은 그 제목과도 같이 재일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과정에서 어쩌다 파친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는지, 일본 내에서도 천대받고 멸시받는 그 일을 어째서 대대로 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어릴 적에는 일제 시대 한국인들의 삶이란 친일파 아니면 독립운동가의 두 가지 길밖에 없는 줄 알았다. 좀 더 자라서 그런 이들은 극히 일부이며 대다수는 그냥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란. 생각해보면 1970-80년대에도 모두가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듯이, 그렇다고 정권을 무조건 옹호하며 국민을 탄압한 것이 아니듯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미디어나 문학작품에서는 늘 친일파 vs 독립운동가의 구도만 부각시켰다. 따라서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도,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파친코>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듯 이념도, 신념도, 민족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 독립군도, 친일파도 아니었던 대다수의 한국인들. 그 중에서도 일본으로 이주했던 이들의 삶이 <파친코>에 담겨 있다. 같이 등장하는 일본인들 또한 포악하고 악랄하며 잔인한 착취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아리랑>이나 <여명의 눈동자> 속 악덕 순사들처럼. 그들 역시 평범한 한국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본인으로 묘사된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그렇게 일상적인 평범함 속에서 일상적인 차별을 행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이처럼 여러 차별과 제약 속에서 살아야 했던 재일 조선인들의 삶은 늘 변방의 한 끄트머리, 경계선 상에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조선인이라며 차별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 안에서 살아가야 했던, 지금도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의 굴곡과 깊이를 외부인이 어찌 다 짐작할 수 있을까.

대학생일 때 토토로하우스란 곳에서 일본어로 교환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상대에게 일본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짝이 되었던 아이가 재일교포였다. 그를 통해 다른 재일교포 친구들도 여럿 알게 되었다. 별 문제 없이 잘 지냈음에도 희한하게 관계가 늘 흐지부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재일교포들은 일본인 친구들과 다르게 대하기가 불편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스스럼없이 같이 어울렸지만 재일교포들은 늘 따로 뭉쳤다.

그들은 일본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고, 일본이 얼마나 세련되었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우월감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거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드러냈다. 그 미묘한 온도차이가 나는 불편했고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본인 친구들은 신선하고 낯설며 신비로운 ‘외국인’이었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기심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지만 재일교포들과는 그렇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기에 내가 너무 편협하고 무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내 안에는 흑과 백, 선과 악, 외국인과 내국인, 일본인과 한국인처럼 어떤 이분법적인 세계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들을 대하기 어려웠던 것이고. 그래서였을까. 그들 대다수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일본을 늘 그리워했다. 아마 일본에 있을때는 늘 한국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한국인인 것을 숨기고 일본인인척 하며 살거나, 일본을 증오하면서도 또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오래전 일본인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는 나에게 큰 비밀이라도 말해주듯 소곤 소곤 일러주었었다. 기무라 타쿠야가 아내인 쿠도 시즈카와 결혼한 것은 같은 재일교포 혈통이기 때문이라며, 둘 다 아니라고 적극 부인하지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나 뭐라나.

그때 그녀의 말투에는 호기심과 혐오감이 미묘하게 섞여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늘 친절했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소중한 친구이다. 그녀 말고도 그런 친구들이 다수 있다. 하지만 나의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 친구들은 재일교포들과는 전혀 교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기득권이기 때문에 몰랐을 뿐, 실은 <파친코> 속에 묘사된 삶을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다수 존재할 것이다. 오래 전이지만 배우 전지현씨가 화교 출신이냐 아니냐로 시끄러웠던 사건이 있었다. 부모의 이름이 특이한 것을 보면 화교가 틀림없다면서. 당시 극구 부인하던 그녀는 흔히 중국인의 성이라고 알려진 왕씨에서 전씨로 성까지 바꾸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어떻다고 싶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그 이야기를 했었다.

살아간다는 것, 민족, 이념, 정체성, 자부심과 수치심, 혐오와 사랑 등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번역이 다소 애매한 부분은 있지만(말투가 일반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대화 같지가 않다. 마치 미국인의 대화같은데 이건 영어로 쓰여진 걸 번역해서 그렇겠지) 읽는데 방해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이러한 시대극, 혹은 대하 소설에서 등장하기 마련인 일방적으로 남성을 위해 희생하며 숭고한 모정을 뽐낸다든가, 사랑하는 님을 위해 몸을 판다든가 하는 진부하고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없어서 좋았다. 여성들은 강인하며 서로를 위해 연대한다. 남성들 역시 악독하거나 무능하거나 영웅적이기만 하지 않고 상당히 입체적으로 묘사된다.

여러모로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단순히 훌륭할 뿐 아니라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재미있기도 하다. 이민자의 미묘한 삶과 정서를 이토록 훌륭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작가 본인 역시 미국계 한국인이라는, 이민자의 한 명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녀가 30년이 넘도록 이 소설에 공을 들였던, 재일 교포의 삶에 그토록 빠져들었던 이유 역시 그럴 것이고.




⭐️⭐️⭐️⭐️




조 씨는 딸들을 시집보낸 지 몇 년 되었다. 작년에는 작은딸의 사위가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만주로 도망쳤다. 그래서 지금 조 씨는 사위가 그렇게 기를 쓰고 이 나라에서 쫓아내려 했던 부유한 일본인 손님들에게 가장 좋은 상품을 팔아서 그 훌륭한 애국자 사위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일본인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일 당장 가게 문을 닫아야 하고, 조 씨 가족은 굶어 죽을 것이다. -p.140

일본어가 아무리 능숙해져도 조선인 특유의 억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일본인에게 다가가도 정중한 미소를 얻어낼 수 있는 외모였지만 뭐라도 한마디만 해도 조선인이라는 게 탄로나 환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그는 조선인이었고, 불행하게도 일본인에게 있어 조선인은 성격이 얼마나 좋든 간에 교활하고 영악한 종족이었다. 공정하고 마음이 착한 일본인도 많았지만 그들도 외국인을 경계했다. -p.153

“우린 모두 굶주리고 있어. 그들은 도둑질을 한 거야. 그들이 조선인이라고 우리 친구는 아니야. 다른 조선인들을 조심해야 해. 나쁜 사람들은 경찰이 우리들의 불만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 우리 집은 두 번이나 털렸어. 경희는 보석을 잃어버렸고.” 요셉은 다시 경고하는 눈빛으로 이삭을 바라보았다. -p.165

이삭의 말에 류 목사가 웃었다. “조선인들에게은 아무도 집을 빌려 주지 않아. 이곳 목사가 됐으니 자네도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을 걸세.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될 거라는 얘기야. 두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에서 열두 식구가 살면서 일을 나가는 남자들과 나머지 가족들이 교대로 잠을 잔다네. 돼지와 닭도 집 안에서 기르고 말이야. 수돗물도 없어. 난방도 되지 않고.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는 더러운 꼴로 살 수밖에 없어. 서울에서 온 양반들이 거지꼴이 되는 걸 많이 봤다네. 목욕탕에 갈 돈도 없이 넝마를 걸치고 살고, 신발이 없어서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지도 못해. 그들은 갈 곳이 없어. 일자리와 돈이 있는 사람도 살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 몇몇 사람들은 불법 거주를 하고 있어.” -p.190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몰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67

전쟁 중에 고구마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아서 일본인들을 굶주리게 했던 농부 다마구치와 살아봤지? 다마구치는 전시 규정을 어겼고,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싶어서 그를 도왔지. 다마구치는 아마 자기가 점잖고 존경받을 만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아니면 자랑스러운 애국주의자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전부 다일지도 모르고. 다마구치는 일본인으로서는 끔찍한 인간이지만 사업가로서는 영리한 사람이야. 나는 좋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야. 돈을 잘 버는 사람이지. 모든 사람이 사무라이 정신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믿는다면 이 나라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걸. 천황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아. -p.355

“가끔씩 고국이 그리워요.” 김창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라는 게 없어.” -p.355

와세다에도 조선인들이 몇몇 있었지만 정치적인
색깔이 너무 강해 보여서 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한수와는 매달 점심을 같이했는데 한번은 한수가 점심을 먹으면서 좌파들은 ‘징징거리는 인간들’이고 우파들은 ‘완전 바보들’이라고 말했다. 2-p.70

유미에게 조선인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끔찍한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벗어던질 수 없는 가난이나 수치스러운 가족에게 얽매이는 것과 같았다.
왜 그곳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일본에 달라붙어 사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계모와 같았다. 그래서 유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2-p.99

“노아, 왜 그렇게 화를 내? 내가 널 최고라고 생각하는 거 알잖아. 집에 가자. 가서 사랑이나 나누자.”
노아가 아키코를 노려보았다. 아키코는 항상 그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아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환상적인 외국인의 모습을 노아한테서 찾는 것만 같았다. 아키코는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어울려준다는 이유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아는 그녀가 좋은 사람이자 교육받은 사람, 자유로운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다. 노아는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도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그게 무슨 의미든 상관없었다. 가끔씩은 자신을 잊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불가능했다. 2-p.118

어떻게 야쿠자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인 범죄자였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 하지만 순자는 많은 조선인들이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그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부와 좋은 회사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2-p.124

조선인들에게는 특히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화를 내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도 조선인은 또렷하고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고 한수는 말했다. 2-p.146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재입국 가능한 일본인 여권을 구하려면 일본 국민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자수가 아는 사람 중에는 일본 국민이 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게 아니면 민단을 통해서 남한 여권을 구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연관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난에 시달리는 그 나라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까. 북한과 연관된 조선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본이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2-p.165-166

솔로몬은 아버지와 함께 남한을 수차례 방문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일본인으로 대했다. 귀향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 여행은 즐거웠다. 가슴을 치며 통탄하는 독선적인 조선인들에게 왜 모국어가 일본어인지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맛있는 바비큐를 맛보러 온 일본인 관광객 행세를 하는 게 훨씬 쉬웠다. 2-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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