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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26. 2019

“제 본심을 꿰뚫어 봐주십시오”

<금각사>를 읽고

대학에서 일본문학 시간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었었다. 재미나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징징거리는 찌질이는 뭐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너무 좋다면서 주인공 이름을 예명으로 쓴 가수도 있더라는(....).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실제 생애나 내면세계가 반영된 자전적인 작품으로 그만큼 우울감과 자기혐오의 감정이 강하게 배어있다. 그런 다자이 오사무를 두고 “다자이의 우울증 따위는 아침마다 냉수마찰하고 기계체조하면 싹 낫는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는 정치성향(우익)과 극단적인 말로(할복자살)로 인해 한국에는 또라이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문학적 성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20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뒤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세 차례나 올랐으며 (그것도 무려 30대에) 대부분의 작품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실제 금각사에 일어났던 방화사건을 다룬 대표작 <금각사>는 일본문학 전체를 통틀어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미문과 타고난 문학성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각사>는 정말 매 페이지가 감탄의 연속이었다. 문장은 장면을 눈 앞에 그대로 옮겨놓는 듯 생생하면서도 하나하나 베껴 쓰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사유는 촘촘하고도 섬세하며, 인물들은 입체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 본연의 내면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극도의 고독과 자기혐오가 초래한 비뚤어진 욕망과 미에 대한 집착. 이런 작품을 31세에 썼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부와 권세를 갖춘 명망가에서 이처럼 놀라운 재능을 갖추고 태어난 그였지만 160cm가 채 되지 않는 단신의 왜소한 체격과 허약한 체질로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헬스를 시작하고, 몸짱(....)으로 거듭나는데, <금각사>는 마침 그 무렵 집필했던 작품으로서 주인공을 통해 그의 ‘자기 개조’ 및 ‘행위’의 욕구가 잘 드러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나약함과 자기 연민을 누구보다 경멸했던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던 것은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직접 찾아가 다자이의 면전에 대고 “나는 당신이 정말 싫습니다!”라고 말한 적까지 있다고 하니.... 그런 미시마 유키오에게 “그 말을 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걸 보니 날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군.”이라고 답한 다자이 오사무도 참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렇게 늘 아웅다웅하던 둘(이라기보다는 미시마의 일방적인) 사이의 감정으로 인해 한 명을 이야기하면 늘 다른 한 명이 부록처럼 딸려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무덤 속의 미시마 유키오는 어떻게 생각할는지.... 그러므로 누군가가 밉다고 너무 큰소리로 말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잠시 얻고 간다..... 하여간에, 그래서인지 <금각사>를 읽으면서도 자동으로 다자이 오사무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을 읽다 보면 결은 달라도 두 사람의 내면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비슷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둘 다 강한 자기혐오와 컴플렉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독감에 시달렸고, 그것을 다자이는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소리치며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라고 표현한데 비해 미시마는 “크크큭 나약한 인간 놈들... 이 세상은 어차피 암흑이다... 크크킄”이라고 표현한 정도의 차이랄까. 그래서인지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을 두고 그토록 경멸과 비판을 감추지 않았던 미시마 유키오 역시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다자이 오사무보다 미시마 유키오 쪽을 훨씬 좋아한다. 이민진의 <파친코>라는 소설 속에 “좌파는 맨날 징징거리고 우파는 완전 멍청이야”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징징이보다 멍청이 쪽이 뭔가 그 ‘순수함’에서 더 매력이 있다고 해두자. 말해두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이나 선호도 같은 것이 아닌 작가의 캐릭터로서의 매력과 호기심이다. 실제로 작품들도 미시마 유키오 쪽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미시마 유키오는 파면 팔수록 놀라운 인물이다. 나중에 몸짱(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별로였다고)이 된 뒤에 직접 달력을 만들기도 했다는데, 포즈가 죄다 나무에 매달리거나 화살에 맞거나 밧줄에 묶이거나 하는 것이었다고. 유튜브에 보면 무슨 무술 동작하는 영상도 있고 그렇다. 게다가 오카마로 유명한 미와 아키히로와 연인관계였던 적이 있는데, 그에게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출처. 나무위키)




⭐️⭐️⭐️⭐️





아버지는 결코 현실의 금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p.9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두 종류의 상반된 권력의지를 품게 된다. 나는 역사 중에서 폭군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내가 말더듬이에다가 과묵한 폭군이라면 신하들은 내 안색을 살피며 항상 주눅이 들어 지내게 되리라. 명확하고 유창한 말투로 자신의 잔학성을 정당화할 필요조차 없다. 나의 무언만이 모든 잔학성을 정당화하리라. 이런 식으로 평소에 나를 업신여기는 교사나 학우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는 공상과 더불어 내부 세계의 제왕이자 조용한 체념에 잠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공상도 즐겼다. -p.11-12

외모는 보잘것없었지만 나의 내부 세계는 누구보다도 이토록 풍요로웠다. 무언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을 지닌 소년이 자신을 은근히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p.12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원래 내가 암흑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 관심은, 내게 주어진 난문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내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 같은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p.72

나에게 패전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결코 해방이 아니었다. 불변의 것, 영원한 것, 일상 속에 숨어들어 있는 불교적인 시간의 부활을 의미했다. -p.99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 여자를 밟았다는 그 행위가 기억 속에서 점차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자가 유산했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사금처럼 기억에 침전되어 언제까지고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악의 광채. 그렇다. 설령 사소한 악이라 하더라도 악을 범했다는 명료한 의식은 어느 틈엔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훈장처럼 그것은 내 가슴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p.126-127

정신이 이처럼 소박한 실재감을 지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육체로부터 배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p.189

내 가슴에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 후도 산 꼭대기에서 교토 시가지의 엄청난 불빛을 향해 빌었던 기원의 내용, “내 마음의 암흑이, 무수한 불빛을 감싸는 밤의 암흑처럼 되게 하소서”라는 그 기도 문구였다. -p.217

마치 저주하듯이 나는 금각을 향해, 난생처음으로 거칠게 외쳤다.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목소리는 황량하게 심야의 경호지에 메아리쳤다. -p.224

노사의 원래 복스러운 얼굴은 나를 만나고 나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는 불쾌감으로 기묘하게 단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반면에 나는 노사의 눈이 나병 환자를 보듯이 나를 보는 것이 기분 좋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인간적 감정을 지닌 눈이었다. -p.253-254

“남들이 보는 저와, 제가 생각하는 저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야만 해.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 봐주십시오”라고 결국 나는 말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 봐주십시오.”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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