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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03. 2019

“모든 진실은 부분적”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읽고

르 귄은 보통 SF 작가로 분류되지만 실은 판타지장르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주선이나 외계인, 때로는 초능력까지도 등장하지만 이 곳에서의 우주선은 그저 비행기와 같은 영토 간의 이동수단일 뿐이고, 외계인은 말 그대로 저 먼 우주 어딘가에 사는 이종족일 뿐인 것이다. 이티나 그루트나 요다가 아니라, 인간이되 외계에 사는 다른 종족의 인간. 피부가 퍼렇거나 회색이거나 눈이 검은 눈동자로만 꽉 찼거나 혹은 아예 작아서 허옇게만 보이더라도 어쨌든 여전히 눈이 두 개씩 존재하고 무언가를 먹어야 하고 먹은 만큼 배출해야 하고 성욕이 있어 섹스를 해야 하고 섹스의 뒤엔 결과가 따르고, 결국 출산을 하고 종족을 이어가는 인간.

르 귄은 기존의 거의 모든 개념을 전복시켜 아예 ‘게센’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냈지만,  위와 같이 세계관 내부의 문법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하나하나의 대응 값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공식은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있으면 SF가 아닌 고대의 어느 문명, 혹은 어릴 적 읽었던 잘 모르는 낯선 땅의 전래동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4개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기 별개인 동시에 게센이라는 같은 문명 안에서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등장인물들 또한 어느 시점에서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수차례 반복 등장한다. 주제의식 역시 4개가 모두 이어진다. 서로 오해, 또는 경계하고 있던 두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 그 과정에 ‘용서’란 이름이 어울리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하기까지의 과정이 다양한 행성의 다양한 관습과 역사와 문화 속에서 다채롭게 그려진다.

사실 르 귄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동시에 상당히 어렵기도 한데, 저 ‘게센’이라는 세계관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까만 피부가 귀족적이고 하얀 피부가 천대받는다는 전복적인 설정까지는 그렇다 쳐도, 흰 피부를 가진 노예들을 ‘흰둥이’라 부르는 대신 ‘먼지 놈들’이라고 부른다든지, 이름 하나가 열 음절이 넘는다는지, 등등, 새로 익혀야 할 개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르 귄의 대표작인 <어둠의 왼손>을 워낙 감명 깊게 읽었던지라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멀쩡하다가도 이 책을 펴기만 하면 잠이 들어서 끝내는데 한참 걸렸던 까닭이 아마도...

4개의 단편이 모두 좋았다고는 하기 어렵다. 세 번째 이야기인 <사람들의 남자>는 너무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탓인지 정말 괴롭게 읽었고,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다만 르 귄의 모든 작품을 통튼 듯한 주제의식을 담은 문장이 인상 깊었다. “모든 지식은 지역적이고 모든 진실은 부분적”이라는. 가장 앞에 실린 <배신> 역시 인상이 강하게 남는 작품은 아니었고. 두 번째 <용서의 날>과 마지막 <한 여자의 해방>은 좋았다.



⭐️⭐️⭐️



웨렐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아주 고되었다. 솔리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솔리는 혼자 돌아다녔고, 공적인 지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율배반적인 말이었다. 품위 있는 여성이라면 집에 머물렀고, 남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직 계집종만이 거리를 나다니거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거나 공개적인 일을 했다. 솔리는 자산처럼 행동했지, 소유주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p.77, 용서의 날

가타이는 에큐멘에 가입하길 너무나 강렬히 원했기 때문에 에큐멘 특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솔리가 에큐멘의 일로 대화를 나눈 공무원들과 왕의 신하들,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사람들은 솔리를 남자 대하듯 했다. -p.78, 용서의 날

이 시늉은 절대 완벽하지 못했고 종종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곤 했다. 불쌍한 늙은 왕은 솔리를 열심히 더듬어댔다. 왠지 솔리가 자꾸만 자신의 침대 하녀 중 하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리가 토론 중에 가투요 영주에게 반박하자, 가투요 영주는 신발에게 말대꾸를 듣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멍한 눈빛으로 솔리를 응시했다. 가투요 영주는 솔리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무성화 정책은 효과를 발휘했고, 솔리는 남자들과 일할 수 있었다. -p.78, 용서의 날

“당신은 자유로우니까 솔직할 수 있는 겁니다.” 바티캄은 피니 과일의 껍질을 꼼꼼하게 벗기며 말했다. “우리 중 그럴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p.119, 용서의 날

모든 지식은 지역적이고, 모든 진실은 부분적입니다. -p.252, 사람들의 남자

이제 난 날 여자로 보는 모든 남자에게 화가 났다. 날 성적인 눈으로 보는 모든 여자에게 화가 났다. 타제이우 마님에게, 나는 내 몸일 뿐이었다. 제스크라에서 나는 내 몸일 뿐이었다. 나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던 에로드에게조차도, 나는 내 몸일 뿐이었다. 그자들이 원하는 대로 건드릴, 할, 혹은 사용하지 않을 살덩이였다. 나는 내 몸의 성적인 부분들을, 내 생식기와 가슴과 불룩한 엉덩이와 배를 증오했다. -p.308, 한 여자의 해방

거대 대륙의 모든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결국은 그 세계 전체를 정복한 검은 피부의 인종, 자칭 소유주들은 세상에서 사람은 오직 한 모습뿐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소유주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되어야 하는 모습이며,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알려진 모든 진실을 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알려진 모든 진실을 안다고 믿었다. 웨렐의 모든 다른 사람들은, 소유주들에게 맞서 싸울 때조차도 소유주들을 모방하며 그들처럼 되려고 애썼고, 그래서 소유주들의 자산이 되었다. -p.312, 한 여자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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