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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07. 2019

위태롭고 불안한 나날들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작가를 좋아한다. 일상의 불안과 미묘한 심리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왠지 미묘하게 멀어진 듯한 두 사람의 관계라든지, 모든 것이 조화로운  가운데 어딘가 살짝이라도 건들면 무너질듯한 위태로움이라든지. 문장도 매끄러워서 잘 읽히고.

다만 한 가지, 늘 밀어붙이는 힘이 조금 부족하단 느낌이 있다. 주인공들은 자신을 둘러싼 불안과 균열을 감지하지만 그것을 돌파하지는 못한다. 괴로움이든 공감이든 해결이든 파멸이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지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몇몇 작가들과 이런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더 좋기도 하고, 이야기가 지닌 힘이나 매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아쉽기도 하고.

작년에 나온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매우 서유미스러운 소설집이다. 위태위태하고 불안한 일상, 권태롭지만 딱히 대안이 없는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 6개의 단편 모두 완성도가 높고 시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역시나 밀어붙이는 힘이 부족하고(물론 단편소설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읽고 나면 깊은 인상이나 공감보다는 답답함이 한층 가중되어 있다.


⭐️⭐️⭐️



평소에는 끼니를 대신할 수 있는 종류의 빵만 샀다. 입가심이나 기분 전환용 혹은 커피의 맛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저트용 빵을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얼마나 맛있느냐, 가 아니라 얼마나 든든하냐, 가 빵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에트르에서 일하는 동안 일곱시부터 시작되는 마감 행사 때 떨이로 파는 빵을 한봉지씩 사는 것은 일상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일곱시 10분 전에 매니저는 남은 빵들을 섞어 한봉지씩 묶었다. 나는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투명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빵의 종류를 신중하게 살폈다. 엇비슷한 것 중에서 구성이 제일 괜찮은 것을 골라야 했다. 그 봉지 안에 에트르의 대표 메뉴나 평소 먹어보고 싶던 빵이 들어 있던 적은 없었다. -p.17, 에트르

그 애는 취업을 새해 목표로 잡았다.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나는 아직
새해나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서른한살이 되는데 월세 10만원, 보증금 1000만원 인상에 삶이 휘청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p.24, 에트르

카페 화장실에서 거울을 한참 들여다봤다. 장이 살아 있다면 나를 알아볼까. 그가 아는 소년은 여기 없고 마트료시카의 가장 안쪽 껍데기 속에 손톱만 한 크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건 하나하나 열어보면 안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겠지. -p.59, 개의 나날

그러나 밤의 결심은 아침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낮의 후회만을 몰고 왔다. 밤의 나는 아침의
나를 증오했고 낮의 나를 겨우 견뎠고 밤을 두려워했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 해는 금세 저물었고 쉽게 밤이 되었다. -p.60, 개의 나날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열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키기 힘든 상태였다. 승차권의 교환이나 환불 시기는 지나버렸고 되돌아갈 차편도 없다. 출발지는 사라져버린 지명, 지역이 되어버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실려가고 있고 더 가면 안된다는 자각 속에서 아들을 낳아 키웠다. -p.171-172, 변해가네

책을 읽으며 나는 줄거리만 남은 삶에 대해 생각했다. 배경이 지워지고 관계와 상황이 사라지고 묘사와 대사가 없어져 마침내 몇줄로 요약되는 삶. 나이가 들수록 이력은 길어질지 몰라도 의미있는 문장은 사라졌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희미해지거나 잊혔고 잊어버렸다. 주말 저녁에는 이따금 외로웠으나 그건 일종의 향수에 가까웠다. -p.175, 변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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