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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09. 2019

공포를 미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흉가>를 읽고

최근에 영미권 여성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 귄, 마거릿 애트우드, 앨리스 먼로, 이민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등등. 의식적으로 그리한 것은 아닌데, 끌리는 대로 집다 보니.

언급한 모든 이를 훌륭하다 생각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것은 조이스 캐롤 오츠다. 오츠의 글에는 바다에서 갓 끌어올린  물고기 같은 펄떡펄떡 뛰는 생생함이 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훨씬 더 과감하고 대담하다. 작품성을 갖춘 동시에 페이지가 상당히 빠르게 넘어간다. 아마 장르 문학을 많이 써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을 쓰게 되었을 수도 있고.

과감하고 대담한 문체라는 이야기를 하니 얼핏 한국의 정유정 작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정유정과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본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정유정 작가의 글은 남성 작가들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에. 그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물론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 읽지는 않지만. 오츠의 글은 결단력이 있고 역동적이면서도 여성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여성의 공포와 여성의 욕망이 늘 깃들어있다.

<흉가>는 새로 나온 조이스 캐롤 오츠의 공포소설집이다. 새로 나왔다고는 하지만 한국에 소개된 것이 처음일 뿐 실제로는 1990년대에 출판된 책으로 지금 봐도 세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대를 초월하는 세련된 감각이 있다. 16편의 호러 단편이 실려있는데, 호러라고는 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신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일전에 넷플릭스 <벨벳 버즈소>란 작품을 보고서 ‘미국적인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오츠의 소설 역시 매우 미국적인 공포이야기다. 동시에 매우 여성적인 공포.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모르는 남성들로부터 쫓기거나, 강간당하거나, 위협당하는 꿈을 자주 꾸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쿵쿵 뛰는 가슴을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이 공포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늘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따라다녔다. 때론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상상을 하며 두려워하기도 했다. 한 번은 밤에 인형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상자에 넣어 테이프로 꽁꽁 감아 창고에 넣어버린 적도 있다. 길에서 모르는 남자가 말을 걸면 흠칫 놀라며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대개는 꿈이나, 극단적인 걱정이나, 상상으로 끝나는 것들이지만, 하여간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여성으로서의 근원적인 공포가, 오츠의 소설 속에 들어있다.

두려워하며, 동시에 잊고 있었던 마음속 어떤 깊숙한 공간을 마주하고 반가워하며, 여러모로 인상 깊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오츠는 후기에서 공포를 미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밝히는데,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의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하거나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 이야기들일 수 있겠지만.



⭐️⭐️⭐️⭐️



옛날에 쌍둥이 자매가 살았어요. 한 명은 아주 예쁘고 한 명은 아주 못생겼지요…….” (…) 하지만 메리 루는 정말로 예뻤다. 가끔 거칠고 어쭙잖게 행동했지만 그럴 때조차도 예뻤다. 그 비단결 같은 긴 금발은 누구나 다 기억했다. 그날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애의 시신이 발견됐을 때 신원 확인이 가능했던 것도 백금빛 비단 같은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 <흉가>

“지금의 방식을 살짝 변경하는 거야. 장소는 여기 공원에서 그대로, 아니면 해변으로 내려가서 해도 좋고, 당연히 한낮에만 할 거고. 하지만 그 방식을…….” 스타 씨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초조하게 말을 골랐다. “……실험적으로 하자는 거야.” -<모델>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의 안에서 여성적 본능이 발동해, 자신이 남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데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그녀가 일조했다는 무슨 합리적인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 <상변화>

나이트 박사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진공흡인을 하는 것뿐이라고, 별로 안 아프고 피도 많이 안 난다고. 그러고는 오늘 밤 내내 수술 예약이 밀려 있는데 협조할 거냐 말 거냐 물으며, “나를 못 믿는 거예요? 응?”이라고 덧붙였다. 남성적인 짜증을 부리는 그의 태도에는 어딘가 짠할 만큼 부루퉁한, 심지어 상처받은 듯한 기색마저 있었다. 나를 못 믿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그녀의 애인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나를 못 믿는 거예요?>

신세 망친 여자, 망가진 여자, 모욕당한 여자, 타락한 여자, 돌이킬 수 없이 ‘여자’가 되어 버린 여자. 제셀은 이 시간과 공간에 있는 모든 처녀는 “히스테리 기질”이 있다고, 특히 장로교회 가정교사라면 누구보다도 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쏘아붙인다. (…) 그러자 퀸트는 짜증스러운 투로 웃는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의 제셀, 알잖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걸요.” 그 말이 허망한 비난조를 띠고서 공중을 맴돈다. -<블라이 저택의 저주받은 거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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