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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07. 2018

부모를 미워하는 당신에게

사노 요코의 <시즈코상>을 읽고




  많은 육아서적이 아이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부모의 심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아이가 늘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아이에게 미운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그럴 수 있다고. 그런데 부모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부모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자식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마치 오래된 모성신화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부모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하며 괴로워한다. 자신이 어딘가 망가진 사람 같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런데 본인의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의외로 꽤 흔하게 있는 일이다. 사소한 갈등이나 단순히 삶을 통제한다는 류의 불만이 아니라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격한 증오에 시달리는,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끈을 놓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의 고통의 뿌리는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을 종내에는 미워하게 된, 그리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과 죄책감일 것이다. 어쩌면 마음 한 쪽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죽여도 자꾸 자꾸 되살아나는 감정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여.

  사노 요코의 시즈코상을 읽었다. 시즈코는 사노 요코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동화책 작가이자 에세이스트로 유명한 사노 요코는 <사는게 뭐라고>, <어쩌면 좋아>를 비롯한 많은 에세이에서 어머니와의 일화를 언급했는데, 주로 어린시절부터 묵어온 해묵은 갈등에 대한 것이었다. 사노 요코의 글 속에서 어머니는 4살이었던 사노 요코의 손을 뿌리쳤던 냉담한 사람이자, 그리 나쁜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면서 남들 앞에서는 더 좋은 학교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허영이 가득한 위인인 동시에,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반듯하다가도 뒤돌아서자마자 방금 만난 사람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겉과 속이 다른 불만투성이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사노 요코는 이제껏 다른 에세이집 속에서 그렇게 얼핏 얼핏 언급되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즈코상>에서 더 본격적으로 다룬다. 흔히 한 사람의 성격이란 것은 타고나는 것에 더해 살면서 형성되는 부분이 크다고 여겨지는데, <시즈코상>을 읽다 보면 늘 쓸쓸한 듯, 무심한 듯, 냉정한 듯, 시큰둥한 듯한 사노 요코 특유의 감성은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일정 부분 유래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머니가 일흔살이 넘어서 치매에 걸리고 사노 요코는 2년간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게 되는데, 많은 치매환자의 가족들이 그러하듯 결국은 두 손을 들고 시설로 보내게 된다. 본인의 표현을 빌어오자면 “돈을 주고 어머니를 시설에 버리고 왔다”면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어머니로서의 모든 특징을 잃어버리고 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변한다. 물론 어머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노 요코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에게 용서받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용서받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하는 사노 요코는 드디어 그렇게 어머니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은 요코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어머니를 미워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공감이 갈만큼 많은 글 속에서 시즈코상은 꽤나 밉살스럽고 인격이 나쁜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한편으로 모든 이야기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시즈코상은 허영기 있고 속물스러우며 구두쇠에 냉담한 여인이었던 동시에, 놀라운 가사능력과 책임감으로 7남매 중 세 아이가 죽은 상황에서도, 특히나 가장 사랑했던 장남을 잃고 남편이 죽은 뒤에도 억척스럽게 나머지 4명의 자녀들을 길러낸 사람이기도 하다.

  읽다 보면 부모란 무엇인가, 자식이란 무엇인가, 더 크게는 삶과 인간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히나 부모와의 갈등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더 깊은 공감을 할 듯하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 <재미의 본질>에 따르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우리 안의 무언가를 극복하고 자신이 미워하는 자신을 변형하는 경험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맛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노 요코의 어머니에 관한 글을 모은 <시즈코상>을 보면 그 지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자신이 미워하는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일생 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내 반평생 동안 줄곧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특별히 친밀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를 싫어하는 딸은 나뿐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은  옛날이야기 속의 심술쟁이 할아버지가 파냈던 잡동사니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엄마는 며느리에게 쫓겨나서 떠돌게 된 후로 ‘미안합니다’와 ‘고맙습니다’를 국자로 퍼내듯이 말하게 되었다. 엄마는 ‘미안하다와 고맙다 양동이’ 뚜껑을 연 것이다. 그랬더니 쓴 적이 없는 ‘미안하다’와 ‘고맙다’가 찰랑찰랑 넘칠 만큼 양동이 가득 남아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미안하다’와 ‘고맙다’가 얼마나 좋은 말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은 온화했고, 정감이 넘쳐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미안하다’와 ‘고맙다’는 말은 나를 조금씩 바꾸어갔다.
‘뭐야? 그냥 귀여운 할머니잖아. 도대체 그 난폭하고 험악했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어느 쪽이 진짜야? 치매에 걸리면 인격이 망가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치매에 걸리고 나서 엄마는 인격이 훌륭해졌잖아.’
‘이 사람의 본성은 원래 이렇지 않았을까?’
하마터면 나는 그렇게 생각할 뻔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온화하고 다정스럽기만 한 사람이었더라면, 엄마는 자신의 삶을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엄마였더라면, 아버지는 눈을 감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실버타운에 가는 것이, 엄마를 만나는 것이 기다려지고 즐거워졌다.
‘신이시여, 저는 용서받은 겁니까?’
신에게 용서받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용서받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엄마를 만나러 갈 때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어느 날은 침대 속에서 말했다.
“엄마, 나도 벌써 예순이에요. 할머니가 되고 말았어요.”
“어머, 가엾어라. 누가 그렇게 만든 거지?”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예순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면 좋겠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곧잘 “치매에 걸리는 게 낫다니까. 본인은 뭐가 뭔지 모르니까 말이야.”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 치매에 걸려본 적도 없는 주제에 시건방진 말을 하지 말라는 생각이 든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엄마.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누구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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