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애비뉴의 영장류를 읽고
웬즈데이 마틴의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를 읽었다. 파크애비뉴가 있는 어퍼이스트사이드는 뉴욕에서도 최상류층이 사는 지역이다. 인류학을 공부한 작가는 각종 영장류와 부족을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 최상류층의 삶과 문화를 하나의 부족을 바라보듯이 관찰, 연구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돈도 많고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임신하고 학군 때문에 이사갔다가 (예를 들면 힙스터와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연남동에서 학군이 좋은 대치동으로) 거기서 자기보다 더 부자들을 만나고 깜짝 놀라 충격받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웬만한 칙릿 소설 뺨을 칠만큼 재미있다.
일단 이사를 가는 것부터가 매우 어렵다. 돈만 있다고 무조건 집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위원회의 면접을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한다. 부동산 중개인들은 몹시 거만하기 짝이 없다(요즘 강남도 그런다던데). 어린이집 역시 자리가 난다고 무조건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부모 에세이, 자녀 에세이는 물론, 부모 면접과 자녀의 놀이 면접까지 통과해야 한다. 불과 세살짜리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책의 모든 대목이 흥미진진하지만 특히 아래 인용된 부분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주인공이 버킨백을 사고 싶어 고민하는 장면이다.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보면서 우리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버킨 백 가격은 사립 어린이집 1년 등록비의 4분의 1이었다. 겨울철 휴가비 전체와 맞먹었다. 두세 달치 아파트 관리비였다. 너트크래커 베네피트(자선행사) 테이블 좌석 값의 두 배였다.”
참고로 버킨백은 1200만원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린이집 1년 등록금은 5천이며 아파트 두세달치 관리비라면 한달에 관리비가 최소 400이란 이야기다. 여름휴가도 따로 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럼 일년에 휴가 비용으로 쓰는 돈이 3천만원 가까이 된다. 무엇보다 600만원이나 내야하는 자선행사를 간다니!!!!!!!!! 기부나 후원금은 당연히 좌석값과 별도.
이 모든 것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돈이 많지?”하고 시종일관 충격을 받는 주인공이 하고 있는 생활이다. 본인 말로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최하위 계층이라는 작가가 저런 생활을 하고 있다면 해당 지역의 ‘상류층’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책에서 나오기로는 집집마다 전용기는 기본, 자선행사에서 몇 억씩 기부하고, 집 안에 호크니가 그려준 초상화가 있다는데....아니 호크니가 초상화를 그려줬다니!!!!!
말하자면 미드 가십걸의 실사판 같은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30-40대의 주부들로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돈을 쓰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사회 안에서 생활하는데, 인류학적 관점을 적당히 버무려서인지 흔한 칙릿 소설보다는 좀 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종속된 삶에서는 필연적으로 행복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든가.
“그녀들의 삶과 행복과 정체성은 전적으로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달려 있었다.”
“어퍼이스트사이드 엄마족 중 몇몇은 남편뿐 아니라 남편의 부모에게도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었다. 이 동네에는 엄청난 부를 대물림하는 집안이 대다수여서, 부모가 젊은 성년(그리고 그다지 젊지 않은 성년)에 이른 자녀를 이상하게 어린애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시부모가 경제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비위를 맞춰야만 한다고 내게 토로한 이들도 있었다.”
보통 인권과 성평등 이슈는 교육과 재산 수준이 올라갈수록 같이 따라가기 마련인데 그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거꾸로 되는 모양이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문화는 가부장제 그 자체이다. 모성은 엄청나게 강조되고, 경제 활동은 남성에게 집중된다. 아이도 엄청나게 많이 낳으며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나도 대가족에 둔감해졌다. 도처에 있었으니까. 이 동네에서 한 가족의 자녀 수는 둘이 아닌 셋이 기본이었다. 여기에서 아이 넷은 다른 동네의 셋과 같아서, 말문이 막히기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느껴졌다. 아이 다섯을 낳는 것은 부모가 미쳤거나 독실한 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여섯쯤 돼야 비로소 대가족으로 보였다.”
“서구사회와 부유층 특유의 ‘모성 집약적 육아’ 문화는 내가 연구한 엄마들에게 확실히 재앙이었다.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새런 헤이즈는 모성 집약적 육아를 ‘자녀 양육에 엄마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게 (의무화)하는 성편향적 육아방식’라 정의한다. 끊임없는 감정적 소모를 감당하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의 ‘지능발달’을 ‘촉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며, 그 모든 역할에 철저하지 못하면, 심지어 자유방임하기만 해도 엄마로서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라고 헤이즈는 전한다.”
여성의 외모에도 엄청난 코르셋이 적용되어 수퍼에 갈 때도 밍크코트에 진주귀걸이를 하고 가며 출산한 뒤 본래 몸매로 돌아가기 위해 거의 전지훈련 수준의 운동을 한다. 물론 운동을 하고 자기관리를 하는 시간동안, 애는 보모가 돌봐주고. 일년에 쓰는 꾸밈비용이 최소 1억씩은 된다고 한다.
“남편에게 아내란 값비싼 장신구이자 와인 병처럼 자신의 훌륭함을 입증하는 도구였고, 아내에게 남편은 밥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웃긴 것이, 어퍼이스트사이드와 다른 지역, 이를테면 미국에서도 시골로 자주 나오는 네브라스카와 미시건주의 엄마들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는데, 참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이곳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산모가 느끼는 불안과 부담은 유난히 크다. 네브라스카와 미시건 주의 산모들은 던킨도너츠를 끊고 틈틈이 자기 집 지하실에서 러닝 머신을 뛰면서 마지막 5킬로그램은 반쯤 체념한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살을 빼도 될지 모르지만,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산모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굉장히 평범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암만 네브라스카와 미시건이라 하더라도 애 낳은 뒤 얼마 안되어 자기집 ‘지하실’에, 런닝머신이 있어서, 낮시간에 갓 태어난 아이를 돌봐줄 누군가가 있는 사람들이면 엄청나게 잘 사는 것 아닌가??
예전에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도 얼핏 상류층 재벌들의 삶이 나와 매우 흥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 책 역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당연히 앞으로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별세계의 이야기라 일단은 매우 재미있었다. 다만 이래 저래 비판을 곁들이는 듯 하다가도 “우리가 이렇게 속물같고 이상한 사람들 같아도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들이야, 개별로 만나보면 똑같아. 다들 착해.” 라는 요상한 결론으로 끝나는 것은 많이 아쉽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 인간이 다 똑같지 뭐) 일견 고상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천박한 자본주의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에 대해 변명을 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뭐 구성원으로서 소속집단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하여간 읽다보니 결국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고 비교 역시 인간의 기본 속성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보통 한국인의 속물 근성과 천박함, 교육열 및 비교하는 습성을 내부에서도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그리고 그 비교 예시로 미국이나 일본이 나오곤 하는데, 한국은 좁은 땅덩이에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비교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환경이라 그랬던 것일 뿐 어딜 가나 최상류층으로 올라가면 다 비슷비슷해지는 것 같다. 빈부격차도 극심하고. 이제까지의 한국은 비교적 그 격차를 극복할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차별과 비교에 민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제는 한국 역시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