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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18. 2019

영화 오타쿠의 ‘타인에게 말 걸기’

<혼자서 본 영화>를 읽고

정희진 선생의 열광적인 팬은 아니다. 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을 보면 가끔씩 걸리는 부분이 있다. 글 자체도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과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옳고 그름이 아닌,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는 점을 밝혀둔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보게 되었는데, 읽으면서 정말로 놀랐다. 같은 영화를 보고서도 이토록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이런 사유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의견에 동의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관점 자체가 너무나 참신하기 때문에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정말로 좋았다.

28편의 글 모두가 좋았으나 특히나 북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련의 영화들(공조, 강철비, 공작 등)에 대한 것이 인상 깊었다. 가깝지만 결코 만날 일이 없을(일단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북한 남성에 우리 시대 여성들의 환상이 투영되었다는 해석. 실제 북한의 문화가 남한보다 훨씬 가부장적이라는 현실과는 별개로 남한에는 결코 존재하는 않는 ‘이상’이 북한 남성이라는 캐릭터로 구체화된 것이다. 환상 속의 동물을 쫓듯이. 최근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이처럼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한 과거의 작품들과 사뭇 차이가 난다는 서술이 흥미로웠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이는 20여 년 전 일본에서 처음 한류 열풍이 불었던 것과도 비슷하다. 당시 일본 여성들은 <겨울연가> 속 배용준을 통해 일본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남성과 사랑에 빠졌었다. 한국에도 실제로는 욘사마와 같은 남성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별개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싶어 결국 구매했다. 서평이 단순한 감상 이상의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과 이후에 깊고 넓은 독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평을 쓰는 것은 서평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매우 단편적인 생각밖에 적을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책에 비해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입장에서 당연하다.

저자는 글을 쓰는 것 외에 자유시간 대부분을 영화를 보며 보낼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 덕후’라고 한다. 이토록 독특하고 뾰족한 사유는 오직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p.19, 서문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p.27, 가족 밖에서 탄생한 가족, <가족의 탄생>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분노할 때는 상대가 나를 이용했다는 판단이 들 때다. 자신이 ‘고양이에게 먹힌 생선’이었다는 기분이 들 때, 화가 나고 불쾌하고 때론 비참하고 자책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내가 사물로 다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상대에게 무시당하고 어느 부분만 착취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의 고통을 즐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p.39, 사랑한다’와 ‘사랑했다’, <하얀 궁전>



성매매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성 손님의 구타, 강간, 살인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여성 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부딪히는 여론은 “그 여자들은 어차피 그런 걸 각오한 사람들 아니냐.”라는 것이다. 여성의 섹스가 매춘이든 사랑이든,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선택일 때, 여성은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해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p.42-43, 남성이 요부가 될 때, <인 더 컷>



여성이 자기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사회가 여자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섹스는 생명과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된다. 여성이 다른 삶을 모색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때, 성은 이 모든 것들의 변화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여성에게 섹스는 이토록 중요하다. 섹스가 여성에게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을 때는 젠더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섹스에 묶어두었기 때문에,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자기 혁명의 증표가 되어버린다. 사회가 얼마나 야비한 구도로 형성되어 있는지를 섹슈얼리티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은 없다. -p.48, 남성이 요부가 될 때, <인 더 컷>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검열과, 그 검열을 남자들의 기대 이상으로 초과 달성하려는 검열이 과잉 내면화된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자기 경험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여자에게 어떠한 추방과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혜석처럼 살고 싶지만 나혜석처럼 죽고 싶은 여자는 없는 것이다. -p.53,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특정인의 사회적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 경험은 ‘특수한 경험’이고 서구/남성의 경험은 ‘보편적 이론’이 된다. -p.62-63,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디 아워스>



여성 문제 전문가, 아니 ‘문제 여성’ 진단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 땅의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조선 시대에 비하면 여자들 사는 게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중세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더는 투쟁하거나 진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다.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2010년대 여성의 지위는 2010년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되며,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되지 않고 노동 계급 남성과 비교된다. -p.65,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디 아워스>



‘이영애’는 성 역할 고정 관념과 이에 기초한 계급 제도를 강화하는 전형적 이미지지만, 배용준, 아니 <겨울연가>의 강준상은 남성 젠더를 파괴하는 전복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이영애’를 좋아하는 남성은 비난받지 않지만, ‘배용준’을 좋아하는 여성은(대표적으로 일본의 중년 여성들) ‘아줌마가 주책’, ‘외로운 여자들의 현실 도피’, ‘신데렐라 드라마에 취한 골 빈 여자들’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p.86, 사랑한다면 ‘배용준’처럼, <외출>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그 소녀는 상처받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권력에 저항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너희들은, 나를 망칠 만큼 대단하지 않아.”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p.105,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p.118,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밀양>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 대화를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p.124-125, 가해자를 찾아가 만난다면, <끔찍하게 정상적인>



현실의 재현은 종종 현실을 대상화해, 현실로부터 인간을 분리해낸다. “우리는 아니다.”라고 안도하거나 마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사실처럼 ‘충격’만 받는 것이다. 심지어 이란 사회 내에서도 이런 일은 ‘시골’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p.155,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더 스토닝>



유대인 학살은 근대성의 모순이고 돌팔매질은 봉건적인 관습인가? 과도한 다이어트로 사망하는 서구 여성은 차도르를 둘러야 하는 여성보다 더 자유로운가? 이는 오래된 논쟁이다. 이슬람(아시아, 아프리카.....) 여성이 마주한 폭력의 현실을 ‘비서구’ 사회 야만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건 새로운 식민주의다. -p.156,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더 스토닝>



왜 출세한 여자들은 출세한 남자보다 더 남성적이냐(악독하냐)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건 정말 이상한 질문이다. 조건 좋은 남성도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여성이 출세하려면 자신이 주류보다 더 주류에 적합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1980년대 영국에서 남자는 마거릿 대처 한 사람뿐이다.”는 유명한 말처럼 게임의 법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남성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성공은 남성성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와 직결된다. 여성으로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p.220, 여성 리더와 여성주의 리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국 야구단은 같은 선수끼리도 반상의 구별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경기 도중에도 “도련님”, “이놈아”라고 부르면서 싸운다. 이에 반해 일본 선수들은 근대성을 ‘체화’해 모두가 평등한 선수(대중, 국민)라는 정체성으로 뭉쳐 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그러나 이 장면이 당시만의 현실일까. 서구의 좌파나 페미니스트들은 국민의 차이를 균질화하는 국민국가주의를 비판하지만, 한국의 진보 진영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자신을 대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균질성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모든 이들과 동일한 국민이라고 생각할까. 한국의 ‘엘리트’들은 자신을 ‘원 오브 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급, 학벌, 성별, 지역을 둘러싼 특권 의식이 반상을 대신하는 사회다. -p.191, 타인의 시선으로 1루까지 걷다, <YMCA 야구단>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급은 젠더화되고, 젠더는 계급화된다. 계급과 섹스는 맞물리는데, 성별에 따라 정확히 반비례한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여러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만, 권력이 없는 남자는 한 명도 차지하지 못해 한 여자를 여러 남자와 공유한다. 반대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남자와만 섹스하거나 무성애자고, ‘밑바닥 인생’일수록 여러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p.204, 박정희와 김재규의 차이?,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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