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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19. 2019

잊고 있었던, 그러나 늘 존재하던 마음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소영은 점차 한 편의 소설로 발전해갈 만한 메모들을 100MB에 달하는 양만큼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단편 하나 쓰지 못하고 있었다.”

김금희의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에 실린 <온난한 하루>라는 작품의 한 구절이다. 이걸 보는 순간 메모장에 있는 - 어느덧 1571개로 늘어난 - 자의식 과잉의 흔적이 떠올랐다.

소설을 쓰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까지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유야 뭐, 결국은 내가 나를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고. 그렇지만 스스로도 왜 납득이 안 가는지가 늘 미스터리였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라고 가정할 때, 타인에 대해 이해도와 공감도가 평균 이상으로 높은 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원인을 대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신입사원이었던 내게 출신학교를 듣자마자 “어우, 난 그 학교 나온 애들은 다 사이코 같더라.”라고 말했던 회사의 선배가 어떤 경위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늦은 새벽에 뜬금없이 여성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내고, 그것에 대해 상대가 불쾌감을 표명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남성의 마음이라든지, 태극기 집회에 매주 열광적으로 나가는 사람이라든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말이다. 그런데 김금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는 단편보다도 짧은 4-5페이지의 엽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솔직히 말해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인물들은 평범하고, 줄거리는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없다. 그저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는 작품이다. 뚜렷한 줄거리와 캐릭터, 화려한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 소설을 읽으며 어떠한 느낌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김금희 작가를 좋아하고, 그리하여 너무나 즐겁게 읽었지만. 지나간 많은 기억들을, 어두운 밤 강가에 앉아 물에 비친 조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했던, 잊은 지 오래되었던 어떤 마음들을 생각나게 해 준다.

⭐️⭐️⭐️



둘은 밤공기가 너무 좋네, 사람이 참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같은 선문답만 주고받았다. 그건 마음의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대화였다. -p.23-24, 원피스를 돌려줘



한영과 소영은 특히 이런 순간이 오는 것을 경계했다. 술을 마시다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이제 남은 선배나 동기들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사실은 있잖아, 나, 야,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아니고 어떻게 된 거냐면, 하면서 날이 밝으면 테이블 위의 강냉이처럼 쉽게 바스러지고 말 어떤 진심에 대해 떠드는 순간. (...) 소영이 보기에는 그런 고독과 허무의 제스처에 익숙한 인간들이란 결국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살뜰히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인간들인데도 희영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술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의 폭풍을 믿었다. -p.28, 규카쓰를 먹을래



“너는 가끔 잊는 것 같아. 너가 되게 운이 좋은 아이라는 것.”
“내가 뭐가 운이 좋니? 운이 좋으면 이렇게 몇 년을 임용고시를 못 붙겠어?”
“그러니까 그 못 붙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거야.” -p.33, 규카쓰를 먹을래



“언제든 전화가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누구에게서요?”
류는 대답 대신 아래를, 너무 어두워서 거기에 강물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얼굴이 비치고 있는 건가. 너무 멀어서 보이지가 않네.” -p.90, 류, 내가 아는 사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거야. 새로운 너를 얻었잖아.”
“새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뭐?”
”내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그전의 내가 불확실한데, 알 수가 없는데.” -p.206,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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