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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21. 2019

허위와 가식의 세계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아름다움의 선>을 읽고

런던에 여행 갔을 때 옥스퍼드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사실 옥스퍼드인지 케임브리지인지 가물가물한데.... 하도 오래전 일이라. 하여간 한국에서 알게 된 아일랜드 친구가 소개해줘서 별생각 없이 시간 날짜 정해서 만나기로 했었다. 말 그대로 ‘만남’의 의미. 유럽 친구들은 어딜 여행 간다고 하면 그렇게 현지에 있는 자기 친구 누구를 만나보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이게 상당히 묘한 것이다. 굉장히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의 친절함. 말은 안해도 지금 내가 겁나 바쁘고 엄청나게 지루하지만 친구의 부탁이니 너에게 두 시간 정도 할애해주마, 그리고 난 교양인이니 동양인 여자인 너를 친절하게 대해주겠어가 팍팍 뿜어져 나오는 그러한 태도.

이럴 거면 애초에 바쁘거나 여건이 안되어서 못 만나겠다고 하던가, 이쪽에서도 썩 내키는 만남은 아니었거든요, 사실 여행 다닐 때는 어지간하면 동행이나 약속을 안 만드는 편인데 정말 좋은 친구라고 하도 성화를 하기에 나온 거란 말이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밥만 대충 먹고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집에 가려는 찰나에 그러는 것이다. 지금부터 학교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괜찮다고 사양하는데도 다시 같이 가자길래, 잠시 고민하다 따라가게 되었다.

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펍 안에는 대략 5~6명의 일행이 있었다. 다들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모두 호들갑스럽게 인사하며 어디서 왔다고? 이름이 뭐라고? 하고 반겨주더니, 그다음부터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유명한 작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니 보통 외국인이 오면 여행 어디 가봤어? 아 런던은 처음이야? 얼마나 있을 거야? 뭐 이런 이야기라도 예의상 물어볼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때가 유럽여행 3달 중 거의 막바지를 달리던 시점인데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더라고. 보통은 뭐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나 얄팍한 관심이라도 보이기 마련인데. 하다못해 두유 노우 해리포터 뭐 이런 거라도.

스물몇 살 먹은 한국 대학생이 영국 경제나 정치 이야기를 알리 만무하고(물론 아시는 훌륭하신 분들도 계시겠으나) 결국 30분가량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뻘쭘하게 인사하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애초에 권유했던 그 아해는 내내 한마디도 없다가 간다고 하니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만면 띠고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기분이 그랬다. 인종차별을 당한 것도 아니고, 뭐랄까 대놓고 불친절함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입맛이 참으로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눈치 없이 그런 자리에 낀 자체가 잘못이었던 거 같다. 그러나 대체 그런 자리에 왜 같이 가자고 권유를 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괜찮다는데도 거듭!!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역시 아마 영국판 다테마에와 혼네(겉모습과 속마음)의 일종으로 예의상 하는 말을 내가 못 알아들었던 것 같지만. 하여간에 그 경험은 영국스러운 어떤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인상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한국인 1인이 한국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그 아이들이 영국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란 건 당연히 알지만 말이다.

맨부커상 수상작인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은 옥스퍼드 졸업생인 주인공이 동창의 집에 우연한 계기로 기거하게 되면서 겪는 일들이다. 게이인 주인공은 평소에 흠모하던 동창 토비의 집에 우연히 초대되었다가 가족의 골칫거리였던 심리가 불안정한 여동생 캐서린을 돌봐주는 명목으로 아예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된다. 토비의 아버지는 하원의원, 어머니는 재벌 가문 출신으로 엄청난 명망가이다. 주인공은 그들의 위선과 허위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여전히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그 일원이 되기를 꿈꾸는데...

영국 상류층의 위선을 다룬 퀴어소설이라는 점에 이끌려 집어 들었다가 정말이지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 여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었으면 다른 책을 10권은 읽었을 듯. 이렇게까지 안 읽히는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맨부커상 수상작의 특징인가. 그럼에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큰 틀에서 보면 내용 자체가 재미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국보다 훨씬 더 공고한 영국의 신분사회가 잘 그려져 있고, 특유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이 상당히 리얼하고 자세히 묘사된다. 상류층이 ‘교양’을 위해 동성애와 같은 소수계층 혹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교묘하게 차별하는가를 비롯하여 1980년대 영국 사회의 퀴어문화가 어떠했는지 등이 상당히 흥미롭다. 스카이캐슬을 애청했던 많은 이들이 등장인물의 몰락을 고대했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러한 ‘허위와 가식의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불온한 기대 속에 지켜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지만. 서민 출신으로 상류층에 편입되고자 발버둥치던 주인공만 튕겨져 나갔을 뿐이다.


이처럼 소재 및 전개는 대략 흥미롭다면 흥미로울 수 있으나 문제는 영국식 화법처럼 배배 돌려서 말하는 문장 속에 갖가지 요소들이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려진다는 것. 영화를 예로 들자면 0.3-0.5배속으로 재생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중에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하는 답답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하여간에 읽다 보니 그 옛날 런던에서 만났던 그 아해들의 태도가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같은 옥스퍼드 생이어서 그런지 혹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이 당시 그들의 어떤 모습을 연상시켜서 그런지는 모르겠어도.

퀴어 문화와 영국의 상류사회에 호기심이 있다면, 그리고 시간과 인내심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추천. 그 외는 비추천.


⭐️⭐️⭐️ “넌 정말 속물이야.” 그녀는 도발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은 곧 그 가족을 좋아하는 것 또한 속물적이라는 뜻이었기에, 그로서는 얼굴에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닉은 그런 식의 소극적 인정이 최고의 부정이라는 듯 말했다. “난 그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것 뿐이야.” -p.17



그는 어딘가 불안하고 자신이 잊힌 듯한 느낌, 그 파티의 주변인이 된 느낌이었다. 이 파티를 그 자신의 파티로 여기던 순간도 있었는데. 파트너 없는 남자들이 늘어선 독신자 복도의 암울한 전망 속에서 그는 잠시 자신의 외로움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자신은 이 사람들과 함께 이 집에 속하지 않는다는 공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p.110



닉은 그 아파트의 허세 가득한 모습에 혼자 미소를 지었지만, 이 곳 여기 자신이 공유할 수 있는 부에 대한 환상이자 사랑하는 남자의 주거지였으므로 페든가에서 그랬듯 약간 서글프고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부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꾸민 편안과 편리, 그 사물들의 세계를 자신은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질 받아들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세계는 곧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아부를 보장하는 체제였다. 닉은 깊숙이 앉을 수 있는 소파들의 넉넉한 크기와 화장실 세면대 양옆에서 오묘한 빛을 던지는 등불을 사랑했다. 그 세면대에서 면도를 하거나 이를 닦을 때만큼 자신이 멋있어 보이는 순간은 없었다. 포스트모던한 것이 모두 그렇듯 물론 집은 저속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쾌락을 얻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p.274



뷔페 식탁 주변의 무리(모두 예의 바르고 가벼운 농딤을 나누지만 은근히 무자비한) 속에 어린 니나가 자신의 청중과 섞여 있었는데, 대게 그들은 마음씨 좋게 “정말 훌륭했어요!”라고 하고는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피아노 치는 것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단순한 영어로 말했고, 영국 사람들도 그녀에게 같은 방식으로, 하지만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버지께서 감옥에 계시다고? 참 안됐군요!” -p.334



닉은 그들 모두 술을 한모금 들이켜는 것으로 도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술의 양이 적은 것도, 아버지가 부엌에서 술을 준비해 무슨 향응이라도 되는 양 내온 것도 창피했다. 그의 부모는 자랑스러우면서도 불안한 태도로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너무나 작고 아담해서 거의 아이들 같은데, 제럴드는 이 외곽의 삶에 비하면 너무나 빛나고 널찍하고 거대해 보였다. -p.377



토비는 운동을 좋아하고 상상력은 모자란 편이었고, 와니는 나른하면서 돈에는 너그럽고도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오랜 친구라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들은 삶보다는 전제를 공유했다. -p.398



그는 자신이 평생 처음으로 돈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그들과 동등하게 행동하려 애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약간의 돈을 가지고 차 안에, 토비와 와니 뒤에 앉아 있자니 자신이 가진 돈의 액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가 더욱 분명했다. 이제 돈이 한푼도 없을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소심함이 느껴졌다.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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