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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04. 2019

마감이 있는 삶

<일간 이슬아>를 읽고

글을 왜 쓰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렇게 물어볼 만큼 뭐 전문적으로 글을 생산해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만 눈팅 열심히 하면서 속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안다. 쟤는 왜 맨날 저렇게 포스팅을 열심히 하지 뭐 그런.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 슬픈 일, 기쁜 일, 기억에 남는 일, 기억하고 싶은 일을 기록하고,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 쓰다 보면 복잡한 마음이 풀릴 때도 있고, 분노가 가라앉을 때도 있고, 쓰는 것 그 자체로 위안을 받을 때도 있다. 사실 글쓰기는 욕망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라는 점에서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디저트를 먹는 것 마냥 무조건 즐거운가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하다못해 매우 ‘자발적으로’ 쓰는 포스팅이나 서평도,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해야 하고, 그것을 화면에 다시 옮겨야 한다. 읽고 보는 것은 그저 즐기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후기나 감상을 쓰는 것은 좋아서 하는 일인데도 결코 쉽지만은 않다. 어쩔 때는 절로 괴로운 생각이 먼저 든다. 쓰기 싫다는 감각이 자동으로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게 싫고 괴로우면 안 쓰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글쓰기의 모순이다. 쓰는 과정은 괴로워도, 쓰고 난 뒤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쓰게 된다. 주저하고, 회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쩌면 운동하고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예전에 회사 다니면서 잠깐 퇴근 후 저녁마다 크로스핏을 한 적이 있었다. 회사 바로 앞의 체육관까지 가는 길에 머릿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이대로 집에 가버릴까 말까를 고민하고는 했다. 고민은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실제로 그냥 가버린 적도 있고. 그러나 그냥 돌아간 날은 몸은 편해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고 내내 괴로웠고, 고민하면서도 운동을 마치고 나온 날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건강해지는 것은 덤이고. 예전에 많은 작가들이 마라톤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해한다.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운 좋게도 기회가 생겨 신문에 칼럼도 연재하는 경험도 해본다. 여전히 가끔은 얼떨떨하고, 악플이 달리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수첩에 이름을 적어놓고(농담....박근혜 아닙니다), 칭찬을 들으면 의연한 척 하지만 뛸 듯이 기뻐한다. 모니터로 얼굴이 감추어져서 다행이다.

그러나 그 모든 기쁨과 보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감이 두렵다. 고작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차례가 돌아오기 2주 전부터 초조해지곤 한다. 24시간 내내, 어쩌면 자면서도 계속 마감과 관련한 무언가를 생각한다. 끝나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그처럼 마감은 늘 고통스럽고, 두려운 존재다. 그런데 그런 마감을 매일 하는 사람이 있다니. 일간지 기자도 아니고 말이다.

이슬아의 <일간 이슬아>를 읽었다. 사실 책으로 나오기 전부터 몇 편의 글은 이미 읽어본 적이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공유되는 것을 보다가 호기심이 생겨 3월부터였나 구독신청을 했는데 앞의 이야기들과 이어진다고 과월호부터 보는 게 좋다고 했었다. 몇 편이라고 하는 이유는 구매한 글 전체를 읽는데 실패했기 때문이고. 종이에 적힌 활자가 아닌 메일로 글을 읽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일단 핸드폰에 손을 대면 글을 읽는 것 말고도 할 것이 너무나 많아진다. 글의 완성도와 그 글에 느껴지는 호감과는 별개로.

하여간에 책으로 나오지 않을까 많이 기다렸었는데, 나왔고, 읽었고, 좋았다. ‘솔직한’ 감정들이 좋았다는 평을 몇 번 보았는데, 그것도 물론 좋았지만, 최우선적으로 작가가 성실해서, 용감해서 좋았다. 조금씩 늦는 경우는 있어도 그 긴 연재 기간 동안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았다는 데서 놀랐다. 단 한 차례 미리 예고하고 양해를 구한 적은 있으나.

실은 많은 이들의 감상처럼 ‘솔직하다’는 것은 그녀가 대단히 성실한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라는 생각을 한다. 솔직해지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먹기가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일단 내가 보기엔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하여 잘 모른다. 이슬아는 스스로의 감정의 결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내 마음이 어떤지를 살피고 싶어 진다. 책 중에 본인의 재주는 타인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녀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이상 성실할 수 없을 듯한 자아탐구의 현장. 회피도, 거짓도, 타협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응시.

에세이도 좋았고, 후반부에 실린 여행기도 좋았다. 다만 문학동네에서 나온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에 실린 글 대부분이 이 책에 실려있는 것을 알고 조금, 아니 실은 상당히 분노했다. 솔직히 말하면 독자로서 약간은 기만당한 느낌까지 받았다. 해당 글들을 빼기에는 흐름이 연결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하여간에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감은 너무나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의 기쁨을 준다. 학자금을 갚아야 하는데 아무도 청탁해주는 이가 없어 스스로 마감을 만들어 글을 팔았다는 이슬아 작가 역시, 단순히 돈만이 이유였다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매일같이 고통스러운 마감을 견디어낼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마감에도 골골대고는 있으나, 각종 문의, 섭외, 매우 환영. 저렴하게 모십...


⭐️⭐️⭐️
밤에 애인이 오겠다는 약속이 딱히 없는 날에도 작고 노란 조명과 디퓨저 가습기를 켜놓고 외출한다. 애인이 안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성실해진다. -p.38, 외박(上)




조만간 그 시를 걔한테 조용히 읽어줄 미래가 오기를 희망해보았다. 남의 글을 빌려 말하는 내 호언장담을 듣고 걔는 아마 웃을 테고, 나는 꿋꿋하게 물을 것이다. 정말 좋지 않냐고. 내가 너의 애인이어서 너는 얼마나 좋으냐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나라서 싫은 날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p.94-95, 호언장담



나는 지칠 줄 모르고 내가 된다.
그 사실이 지겨워 죽겠을 때가 있다.
(...)
남들 중에 나를 지겨워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남을 계속 만나고 싶어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남이고 싶어서 그렇게나 연애에 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p.103, 꿈꾼이



그러나 자라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온 세상은 내게 딱히 관심은 없다는 것을.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동물과 장소 등은 사실 아주 적었다. 세상의 극히 일부여서 오히려 외로울 정도였다. -p.132, 옷과 무대



남을 쓰고 그리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나는 나만 아니까. 남은 모르니까. 타인에 관해서 쓰는 건 자주 실패로 끝났다.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시도하고 썼던 대사와 문장들은 꼭 어설펐다. 어설프지 않으려면 아주 주의깊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했으나 나는 남에 대해 쓰는 일에 성급하고 게을렀다.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지 독자들에게 뽀록나며 창피를 당했다. 매 문장에서 밑천을 들켜버린다니 글쓰기란 지독하게 두려운 일 같았다. -p.136, 옷과 무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외숙모가 한참 만에 말했다.
슬아는참.....자유스럽구나!
하나도 안 그래요, 라고 말하며 나는 웃었다. 자유라니. 나랑은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성욕으로부터, 임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연애의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경솔한 섹스를 해버리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돈으로부터, 그밖에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안 자유로워서 받은 시술이었다. -p.206



춤을 별로 못 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창피했다.
그리고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못한다니 마음이 정말 편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대부분 내가 조금 잘하는 일이었다. 잘할 걸 알고 못하기 싫기 때문에 기대와 희망과 부담을 놓기 어려웠다. 재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조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p.289, 잘 못하는 데도 계속 하는 일들



잘 혼자가 되려고 달리기를 해왔다. 글쓰기나 달리기나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점이 비슷했다. 슬픔을 길 위에 버려가며 달렸던 날에는 몸에 있던 독기가 빠지는 것 같았다. 달리는 건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영역이었다. -p.467, 말보다 앞서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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