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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06. 2019

불평등한 몸

<우리 몸이 세계라면>

고만고만한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신도시나 부동산 카페에는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어느 아파트가 좋은가요?” 대부분 자기가 사는 곳을 내세우며 싸우게 되는, 이른바 콜로세움을 부르는 질문이나, 댓글을 주욱 흝다보면 어느 정도 공통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초품아’. 초품아는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란 뜻이다. 단순히 학교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넘어서 아예 학교와 아파트가 붙어 있는 것. 초품아는 지역을 막론하고 매우 인기가 있다.

얼마 전에도 A와 B 중 어느 아파트로 이사 갈까 고민이라는 글이 올라왔고, 서로 자기 아파트가 좋다고 싸우는 와중에 누군가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어휴, 아파트는 무조건 초등학교랑 붙어있어야죠. 아이가 큰 도로를 건너지 않아서 얼마나 안심인지 몰라요. 아이들 키울 때는 안전이 제일 아닌가요!” 나 때는 1-2킬로 떨어진 거리도 잘만 다녔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나 역시 그랬다. 심지어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닌 적도 있고) 실제 사고의 가능성과는 별개로 초품아에 사는 것이 더 큰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사실이다. 교통사고, 미아, 유괴 등의 위험이 그만큼 줄어드니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품아는 인근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다른 아파트에 비해 가격이 더 비싸다. 초품아의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아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매년 4월이 되면 어김없이 세월호가 생각난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누군가들의 말처럼 교통사고와 같은 어쩔 수 없는 불운이었던 것일까. 만약 그 아이들이 배 대신 비행기를 탔으면 어땠을까. 시간을 거슬러 다시 돌아가면 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과거로 돌아간들, 그래서 단원고 아이들이 그 배를 타지 않았다한들, 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그래서 최저가와 특가만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그래서 저렴한 비용을 맞추기 위해 시설 점검이 제대로 되지 않은 노후한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는 반드시 죽지 않았을까.

기회와 결과의 평등에 대해 생각한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갖고 더 많은 혜택을 입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것이 맞을까. 24세 김용균씨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그런 위험에 노출되고 끝내 죽어도 되는 상황이 당연한 것일까.

누군가는 그게 억울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안전한’ 일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애초에 그런 일거리밖에 찾을 수 없었던 사람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과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공부하고 노력할 기회가 주어지기는 하는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말하던 정유라의 말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리고 설사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들, 능력이 부족했다고 한들, 노력을 조금 덜 했다고 한들, 그것을 이유로 그 정도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옳은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평등하다. 절대적인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영국도 미국도 모두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건강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보다는 영국이, 영국보다는 스웨덴이 그 건강불평등의 규모가 훨씬 더 작은 나라라는 지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전작인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같이 ‘원인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책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병에 많이 걸리는지, 나쁜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하지만 왜 그런 습관을 개선하지 못하는지, 그게 과연 개인의 의지력에만 달린 문제인지. 더불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차이를 전제로 이루어졌는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점에 다수이자 기득권인 우리들은 얼마나 무관심한지에 대해.  전작에 비해서 사고가 더욱 깊어졌고, 개별 케이스 스터디를 넘어 맥락과 배경에 대해 고민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매우 흥미롭고 아프게 읽었다.

뭐 하나 특별히 꼽기 어려울 정도로 전반적으로 훌륭한 책이지만 무조건 좋아졌을 것이라 생각한 사망률 관련 불평등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대목이 특히나 인상에 남는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이제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오른 한국이기에, 모든 사람의 평균 수명과 기대 수명이 늘어났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망률에 대한 상대적 불평등지수는 1970년에서 2010년까지 여성은 5.38에서 5.44로 약간 증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남성은 그 지표가 5.40에서 8.85로 악화되었다”라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사회의 발전과 혜택은 과연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그리고 이처럼 불균형한 혜택은 구성원들의 정서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황정은의 단편소설 <복경>에는 백화점 이불 매장에서 손님들의 갑질에 시달리며 받은 스트레스를 인근 지하상가의 옷가게 점원들에게 푸는 매니저가 나온다. 그녀는 왜 그러냐는 부하직원에게 답한다.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 나는 이 장면이 현재의 한국사회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재벌 일가의 갑질 기사를 보면서 분노하는 사람들은 돌아서서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착취하고 짓밟으며 살아간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다 보니 이러한 모습이 실은 개개인의 인성이 악해서라기보다도 한국 사회의 소득과 건강불평등의 차이에서 기반한 전반적인 문제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이러한 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연구는 연구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학계에서 별다른 관심도 주목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별다른 크레딧이나 지원을 받기 어려운 것은 물론, 기존의 세계에 균열을 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환영은커녕 비판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김승섭 교수는 그러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단기적인 성과만을 주목하는 오늘날 대학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의 몸과 질병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엄혹하고 냉혹하게만 느껴지는 세계에 이러한 학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


지위불안은 ‘어떤 사람들은 내 직업이나 소득 때문에 나를 무시한다’라는 질문을 통해 측정했습니다. (....) 모든 사회에서 소득이 낮을수록 지위불안 점수는 높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부터 가장 부자인 사람까지 모든 집단에서 지위불안 점수가 2점이 넘었습니다. 소득불평등이 적은 사회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층을 제외한 모든 집단에서 지위불안 점수가 2점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소득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상대방이 나를 무시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p.149, 불평등이 기록된 몸



문화인류학자인 김찬호 교수는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핵심 키워드로 모멸감을 말합니다. 모멸감은 상대방이 나를 ‘업신여기고 얕잡아보는 감정’을 뜻합니다. 오늘날 직장과 사정에서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는 일이 잦아지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상환이 많아지는 이유를 분석할 때, 지난 20년간 급격히 악화된 한국사회의 소득불평등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p.149, 불평등이 기록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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